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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평화협정 체결로 ‘미 제국주의’ 항복 얻으려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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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북한 비핵화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석 달 사이 일곱 차례나 정상 외교를 펼치는 모습에 이번에는 북핵 폐기와 관련해 무언가 진전이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오기도 했지만, 현재 상황은 한여름 무더위만큼이나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미국의 선 비핵화 요구와 북한의 선 체제안전 보장 요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슬금슬금 대북 제재의 망을 성기게 만들어가고 있다. 김정은의 광폭외교 노림수와 북·미·중의 3각 게임을 어떻게 봐야 하나.

김정은의 광폭외교 노림수는 #핵폐기의 최소화와 최장기화 #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폐기 담은 #평화협정 체결 위해 중국 활용 중 #진정한 북한 비핵화 이루려면 #한반도 질서 놓고 미·중 합의 필요

김 위원장의 광폭 외교가 새로운 건 아니다. 1999~2002년 펼쳐진 김정일의 광폭 외교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전략적, 경제적인 공통점이 있다. 우선 시대적인 배경에서 보면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권력 승계자가 정권을 확고하게 하는 과정에서 대외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nugu@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nugu@joongang.co.kr]

북한이 대내적으로 정권을 강화하는 시기에 북·중 관계는 모두 소원했다. 그 결과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6년 만에야 중국을 방문했고, 김정은은 김정일 사후 7년이 돼서야 중국을 찾았다. 북·중 관계는 지도자 교류가 회복되며 비로소 복원될 수 있었다.

전략적인 관점에선 핵 문제로 미국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미국으로부터의 압박이 가중되고 있었다. 김정일의 2000년 방중 이전엔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 재가동에 대한 미국의 의심이 깊었고, 김정은이 지난 3월 중국을 찾기 이전엔 북한의 핵, 미사일 실험으로 북·미 관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광폭 외교 이후엔 경제적인 후속 조치가 뒤따른다는 점이다. 중·미 등 주요국들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자 북한은 국가 경제 건설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선회하면서 일련의 개혁 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2002년 ‘경제관리 개선 지침’, 일명 ‘7.1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2003년엔 신의주 경제특구를 지정했으며 2011년 사망 직전까지는 황금평·위화도 개발사업 추진에 주력했다. 김정은 역시 방중 직후인 4월부터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현대화를 천명하며 경제시찰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북한의 개혁·개방 가능성에 대한 국제 사회의 기대치를 높인 것도 공통의 사실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nugu@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nugu@joongang.co.kr]

북한이 미·중과 펼치는 외교의 실상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선 북한을 미·중 두 나라 사이의 종속 변수로 봐서는 안 된다. 북한을 종속 변수로 보면 미·중 두 나라와 관계가 안 좋았던 북한이 어떻게 능동적으로 미국과의 회담, 그리고 갑작스러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북한과 미·중 모두를 독립 변수로 봐야 이들 나라가 벌이는 3각 게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3국은 각기 자국의 국익에 따라 행동한다. 자신의 국익 프레임워크에서 서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결국 북·미·중 3각 관계의 행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 나라 3각 관계의 전략과 목표를 알아야 한다.

이 같은 3각 관계에서 북한의 최고 목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이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의 폐기를 담은 평화협정을 체결해 대내적으로 ‘미 제국주의’의 항복을 얻어냈다는 쾌거를 올리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북한은 1948년 이래 줄곧 중국을 이용했다. 냉전 시기엔 중국을 대미 창구로 활용했고 냉전 이후엔 대미 협상의 실패에 대비해 중국을 ‘보험’으로 이용하는 이중 전략을 구사해온 것이다.

반면 미국은 전통적인 틀 안에서 행동한다. 3각 외교에서 미국의 전통적 목표는 상대국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패턴은 미·중·소 3각 외교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1972년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할 때 소련과는 이미 데탕트 관계에 있었다. 중·소 관계의 악화를 이용하면서 중·소 모두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이들 두 나라에 대한 지배적인 우위를 선점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중국의 3각 외교 특징은 ‘헤징(위험 회피)’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적 관점에서 3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미·중 관계의 정상화를 추구했다. 결국 북·미·중의 3각 관계는 동상이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북·미·중 3각 관계 또한 여느 3각 관계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두 나라와의 관계가 모두 좋으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이고, 모두 안 좋으면 ‘왕따’다. 만일 한 나라와만 관계가 안 좋으면 헤징이 가능하다. 한데 이 3각 관계는 북·미 관계의 적대적인 속성과 북·중 관계의 동맹 속성 때문에 왕따에서 헤징으로 전환이 가능하다. 즉 앞면과 뒷면의 구별이 없고 좌우의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내재적 구조를 갖고 있다.

북·미·중의 뫼비우스의 띠는 세 개의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다. 미국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안일함, 북한의 대미 관계 정상화의 실패에 대한 불안감과 대미 불신으로 인한 ‘중국 보험’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 그리고 중국의 헤징 전략이다. 바로 이런 연결 고리 때문에 북·미·중 사이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끊기가 쉽지 않다

이런 악순환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두 가지 사항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하나는 미국의 대북 대화 시도, 북한의 광폭 외교, 중국의 북한 감싸기 등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광폭 외교 이면의 노림수를 파악해야 한다.

북한의 노림수가 핵폐기의 최소화와 최장기화 전략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도취하는 것은 금물이다. 북한의 지지부진한 시간 끌기 성격의 핵폐기 움직임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북·중의 결탁으로 이뤄진 6자회담의 실패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의 핵 야욕을 역공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 꼭 ‘대북 압박’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

미·중 두 나라가 진정으로 북한의 비핵화 이후 발생할 한반도의 역학 구조와 질서 변화를 수용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타진하는 게 중요하다. 이젠 미·중의 의사를 타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사전 확인이 없었기에 6자회담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미·중이 북핵 폐기 이후 형성될 한반도 질서에 대한 타협이 먼저 이뤄져야 북한 비핵화 문제가 비로소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주재우

미국 웨슬리안대 학사,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석·박사. 연구 분야는 중국외교와 미·중 관계, 북·중 관계 등. 저서로 『한국인을 위한 미중 관계사』 등이 있다.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