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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 분리인가 참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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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여당이 대통령의 소신을 확인하지 않고 공약했다가 차질이 생겼다."(2004년 6월 9일.노무현 대통령, 민노당 의원들과의 만찬)

"정책에서 당과 청와대, 정부가 입장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논쟁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2004년 6월 14일.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원, 보도자료)

"당정청(黨政靑, 당과 정부.청와대)은 각자의 입장을 발표해 놓고 조율할 것이 아니라 조율을 거친 다음 말해야 한다. 나조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대통령 뜻이 저런 것이었구나' 확인하면 압력을 느낀다."(2004년 6월 21일.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 인터뷰)

당청 갈등은 2004년 6월 아파트 원가 공개를 놓고 시작됐다. 그 후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대연정 제안 등을 놓고 혼선이 이어졌다. 급기야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던 사학법을 둘러싸고도 문제가 터졌다. 차이라면 그동안엔 당이 일방적으로 대통령의 뜻을 수용했으나, 이번엔 대통령의 재개정 권고를 조심스레 거절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정치권과 국회의 일에 어떤 형식으로든 개입했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창당 후 당청 관계에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바로 당정 분리다. 그러면서'정치적으로는 당정 분리, 정책적으론 당정 일치'라는 형식 논리를 강조했다. 내용은 청와대와 당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자는 의미가 강하다. 당 인사들이 대통령을 만나 당정 분리의 비효율성을 건의할 때마다 노 대통령은 "지난 총선에서 단 한 명의 공천권도 행사하지 않았다"는 말을 꺼내곤 했다. 서로의 영역을 철저히 구분하자는 얘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정책에도 어느 정도 정치적 색깔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건 정치고, 저건 정책"이라고 두부 모 자르듯 나눌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와 정책의 영역을 대통령이 스스로 판정해 개입한다면 당정 분리는'당정 참견'으로 변질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노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이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3.30 부동산 대책 등 민생 관련 법안의 국회 처리는 절박할 것이다. 그러나 거쳐야 하는 절차와 다뤄져야 하는 장(場)은 분명히 따로 있다.

한 여당 의원은 "여당 주도로 통과시킨 개정 사학법은 4대 개혁입법 중 유일하게 실현된 법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며"대통령이 이를 재개정하도록 양보하라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요구"라고 말했다. 그는 "당내 중도성향의 의원들까지 노 대통령이 당정 분리의 원칙을 훼손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해하기 힘든 '원칙'보다 쉽게 알 수 있는 '상식'이 중시됐다면 '청와대와 여당이 짜고 친 고스톱 아니냐'는 음모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수호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