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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도이머이(쇄신) 30년 만에 경제규모 14배로 성장한 베트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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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오, 북한에 베트남 모델 권유 왜?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 7월 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베트남처럼 기적과 같은 경제 번영을 이뤄라”라고 촉구했다. 이날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현지 기업인 모임에서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에 관심이 쏠린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지난 1995년 미국과 수교한 베트남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과 베트남 간 교역은 8000%로 늘었고, 미국 기업들은 수십억 달러를 (베트남에) 투자했다”라고 지적했다. 과거의 적국이 번영의 동반자가 됐다.

뽕밭이 변해 바다가 됐다. 베트콩의 나라 베트남의 최대 도시인 호치민의 스카이 라인. 1986년 도이머이 정책 이후 GDP가 14배나 성장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발전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호치민=김경빈 기자]

뽕밭이 변해 바다가 됐다. 베트콩의 나라 베트남의 최대 도시인 호치민의 스카이 라인. 1986년 도이머이 정책 이후 GDP가 14배나 성장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발전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호치민=김경빈 기자]

미, 북한에 개혁·개방·번영 위한 #베트남 모델 왜 적극 권유했을까 #75년 공산화 무력통일 이뤘지만 #사회주의 경제 체제 한계 자각 #'과거 닫고 미래를 열자' 라며 #한국··미국 등 옛 적국들에서 #외자 적극 유치해 경제 개발 #사회주의 지향 시장경제 발전

현재의 베트남 경제는 한 마디로 ‘우등생’이다. 성적표인 경제지표가 잘 말해준다. 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전망치에 따르면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은 명목 금액 기준 2407억 달러로 세계 47위다. 물가 등을 고려한 구매력 기준(PPP)으로는 7057억 달러로 세계 35위다. 1인당 GDP는 명목 금액 기준으로 2546달러이며 PPP로는 7463달러에 이른다. 경제성장률은 2018년 1분기에 7.38%였으며 2017년에는 6.91%였다. 고성장 국가인 셈이다.

 베트남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지난 7월 8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푸쫑(阮富仲)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고 있다. 뒷쪽에 사회주의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인 호치민(胡志明)의 흉상이 보인다. [AP=연합뉴스]

베트남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지난 7월 8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푸쫑(阮富仲)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고 있다. 뒷쪽에 사회주의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인 호치민(胡志明)의 흉상이 보인다. [AP=연합뉴스]

5510만 노동인구 사실상 완전 고용 

베트남은 경제성장의 동력인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하다. 베트남은 한반도의 약 1.5배인 33만1230㎢ 넓이의 국토에 인구는 9456만 명에 이른다. 노동인구는 5510만으로 집계됐다. 이 거대한 인구에 일자리를 주고 먹여 살리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실업률은 2018년 1/4분기에 2.2%다. 사실상 완전 고용상태다. 평균 월 급여는 2017년 기준으로 650만 동(미화 약 300달러)에 이른다.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에 경제발전 모델로 베트남을 소개한 이유일 것이다. 북한은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분석가들은 2015년 기준으로 GDP 약 250억 달러, 1인당 GDP 약 1000달러로 추정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 메리어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한-베트남 비즈니스 포럼에서 '새로운 25년을 여는 한-베트남 경제 협력의 미래'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베트남은 문 대통령이 대회 협력 다각화를 위해 추진하는 남방정책의 핵심 국가다. 베트남은 과거 싸웠던 한국과 1992년 수교하면서 외자 유치와 경제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5년 대미 수교를 통해 베트남은 성장의 기회를 확대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 메리어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한-베트남 비즈니스 포럼에서 '새로운 25년을 여는 한-베트남 경제 협력의 미래'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베트남은 문 대통령이 대회 협력 다각화를 위해 추진하는 남방정책의 핵심 국가다. 베트남은 과거 싸웠던 한국과 1992년 수교하면서 외자 유치와 경제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5년 대미 수교를 통해 베트남은 성장의 기회를 확대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개방 이후 수출 중심으로 경제 발전시켜 

베트남은 수출로 경제를 발전시켜왔다. 무역 통계를 보면 베트남이 얼마나 개방 국가인지가 드러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발행하는 ‘CIA 팩트북’에 따르면 2017년 수출은 2140억 달러에 이른다. 휴대전화·의류·전자제품·기계·신발 등이 주요 수출품이다. 부가가치가 상당한 알짜 상품이다. 수출 대상국은 미국(19.4%)·중국(16.6%)·일본(7.9%)·한국(6.9%) 순이다. 수입은 2100억 달러로 주로 기계류·휴대전화(부품)·석유제품·의류 및 신발 재료·전자제품을 들여온다. 주요 수입 대상은 중국(27.6%)·한국(22.1%)·일본(7.9%)·대만(6%)·태국(5%)·미국(4.4%) 등이다.

소련식 중앙통제 계획경제 결과는 가난  

이러한 베트남도 소련식 경제 체제를 적용한 1970~80년대에는 경제난에 시달렸다. 오늘날 북한과 비교해서도 그리 나은 상황이 아니었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하면서 적화 통일을 이룬 북베트남은 이듬해 통일국가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통일 베트남은 소련 체제를 받아들여 일당독재와 고전적 사회주의 경제체제인 중앙통제 계획경제를 운영했다. 중앙정부가 생산과 소비, 가격, 국내 유통, 대외 무역을 손에 쥐고 경제를 통제하는 구조다. 기업을 비롯한 모든 생산 수단은 정부가 소유하거나 생산자가 공유하도록 했다. 이 체제 아래에서 베트남 경제는 소련이나 동유럽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산화 통일의 결과는 여전한 가난이었다.

사회주의 경제 비효율에 부패 만연 

여기에는 경제체제 자체의 모순이 작용했다. 수요와 공급의 메커니즘을 기본으로 인간의 욕망을 경제활동에 적용하는 시장경제와 비교해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효율이 낮았다. 경제의 자원배분을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의 가격조정 메커니즘에 맡기는 것이 시장경제다. 생산수단을 기본적으로 민간이 보유하고 시장 메커니즘에 맞춰 이윤을 추구하면서 경제가 돌아가는 구조다. 반면 소련 체제는 계획경제(planned economy)를 추구해 경제를 시장 기능에 맡기는 대신 국가가 세세한 부분까지 계획을 세워 자원을 배분하는 체제다. 국가가 생산・분배・유통・금융 등 거의 모든 경제 부문을 통제하고 지시하며 경제를 운영했다. 개인의 창의성이나 자발성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숱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문제 해결 과정에서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베트남 대도시의 출근길. 스쿠터 이용이 많다. [중앙포토]

베트남 대도시의 출근길. 스쿠터 이용이 많다. [중앙포토]

86년 도이머이 정책으로 쇄신 시동 

베트남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6년 ‘도이머이(쇄신)’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시작했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주도로 개혁·개방 정책에 뛰어든 중국,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앞장선 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보다 늦었다. 사실 베트남의 경제 개선 정책은 이전에도 있었다. 1979년 국경분쟁으로 베트남·중국 전쟁을 벌여 승리한 베트남 정권은 경제로 눈을 돌렸다. 통일을 이루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를 본격적으로 운영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베트남은 신경제정책을 채택해 부분적으로 경제체질 개선을 추진했다.

부분 개혁 안 통하자 전면 개혁

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자 1985년 6월 제8차 당중앙위원회에서 배급제 일부 폐지, 기업 독립채산제 도입 등을 담은 ‘임금·물가·통화 개혁’안을 결의했다. 사회주의 경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제한적 개혁으로 중앙통제·배급제의 전시체제를 가격체계를 활용한 평시체제로 이행하려 시도했다. 국가보조금에 의존하던 식량·연료 배급을 폐지하고 임금을 인상해 국민이 필요한 물품을 자유시장에서 사도록 했다. 9월엔 통화개혁도 뒤따랐다. 당시로선 과감한 경제 개혁이었다.
그런데도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특징인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따른 물가 급등과 통화개혁 실패로 매점매석이 성행하고 시장 혼란이 지속했다. 통화개혁 책임자인 찬 퐁 부총리가 1986년 1월 말 해임된 데 이어 공산당 기관지 난단이 3월 1일자에 이례적으로 자아비판 사설을 싣고 당의 지도가 서툴렀다고 솔직히 인정했을 정도였다.

무상 배급제 폐지, 가격 자유화로 대수술 

베트남 공산당은 한두 차례 실패했다고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변화와 혁신에 미래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새로운 처방을 내놨다. 오히려 더욱 대대적인 혁신안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도이머이다. 1986년 12월 제6차 베트남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190만 당원을 대표한 129명의 대의원은 도이머이 정책을 결의했다. 도이머이 정책에는 무상 배급제 폐지, 가격 자유화, 국유기업 민영화, 시장 개방과 외국인 투자 유치, 농업개혁 등이 포함됐다. 이후 협동농장·집단농장 폐지를 비롯한 농업 구조개혁과 수출가공지구 설립,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 육성책이 뒤를 이었다. 그 뒤 외국인 투자법을 만들고 여러 차례 개정하면서 본격적인 외자 유치에 들어갔다. 이 외자는 경제 발전을 위한 자본을 달리 확보하기 어려웠던 베트남에 소중한 자산이 됐다. 베트남은 도이머이를 시작한 지 30년 만에 GDP가 14배가 늘었다.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용이 되고 있다.

체제는 유지하고 경제는 개방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의 경제 개혁 정책인 도이머이의 목적은 ‘사회주의 경향의 시장경제’를 이루는 일이다. 베트남의 도이머이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모두 있다. 공통점으로는 정치적으로 공산당 일당독재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경제만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획기적으로 개혁하고 대외적으로 개방한 점은 동일하다.
차이점은 해외자본 투자 방식과 규모, 대미 관계 개선 분야에서 특히 뚜렷하다. 중국은 국내기업 활성화한 뒤 외자 유치에 나섰다. 우선 경제특구 지정해 싱가포르 등 화교 자본을 끌어들여 개발에 나섰다. 화교 자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한몫했다. 정치적으론 일당우위체제, 사회적으론 권위주의를 유지하면서도 대외개방 경제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싱가포르라는 벤치마킹 대상도 있었다. 중화권 경제를 활용한 중국의 경제성장은 곧 순풍이 돛을 달았다. 하지만 해외에 많은 교민이나 교민 자본, 지원하고 지도해줄 벤치마킹 국가가 없었던 베트남의 선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은 초기부터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지난 1월 24일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이 카타르를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하자 하노이 시민들이 국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이 팀을 이끈 한국인 박항서 감독은 양국 교류와 친선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활기차고 희망찬 베트남의 모습이다. [VNA=연합뉴스]

지난 1월 24일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이 카타르를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하자 하노이 시민들이 국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이 팀을 이끈 한국인 박항서 감독은 양국 교류와 친선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활기차고 희망찬 베트남의 모습이다. [VNA=연합뉴스]

과거의 적국과 수교해 투자 유치 

미국은 중국은 대미수교(1979년) 이후 개혁·개방에 나선 반면 베트남은 도이머이(1986년)를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대미수교(2000년)를 했다는 점도 다르다. 베트남 공산당 정권으로서는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간 서로 싸웠던 미국과의 관계 복원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과 중국은 해외자본과 기술 유치 방식도 달랐다. 중국은 공산당과 중앙정부가 지역을 지정하고 그 안에서 외국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를 허용했다. 외국기업에 땅을 임차하고 기업이 직접 투자하도록 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중앙정부가 직접 외국인 투자자를 선정한 뒤 투자와 활동을 허용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베트남이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며 베트남전쟁 당시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미국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은 이미 1982년 미국과 접촉해 실종 미군과 전쟁포로 문제를 협의했다. 승전국인 베트남이 과거의 적국을 만나고 협상하고 교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었다.

2015년 5월 베트남을 방문했던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하노이의 '분짜 흐엉 리엔' 식당에서 요리사이자 CNN 음식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앤서니 보딘(19576~2018)과 현지 서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베트남 서민 음식인 2100원짜리 분짜(쌀국수에 돼지고기와 식초에 절인 채소 등을 넣고 함께 먹는 대중 식사 메뉴)에 스프링롤(춘권)과 현지 맥주를 주문해서 먹었다. 2인분 식사에 7150원 정도가 들었다. 2000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베트남 통일 이전 남베트남 수도였던 호치민의 식당을 찾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 북베트남 수도이자 현재 통일 베트남 의 수도인 하노이의 식당을 방문했다.  [사진=앤서니 부르댕 인스타그램]

2015년 5월 베트남을 방문했던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하노이의 '분짜 흐엉 리엔' 식당에서 요리사이자 CNN 음식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앤서니 보딘(19576~2018)과 현지 서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베트남 서민 음식인 2100원짜리 분짜(쌀국수에 돼지고기와 식초에 절인 채소 등을 넣고 함께 먹는 대중 식사 메뉴)에 스프링롤(춘권)과 현지 맥주를 주문해서 먹었다. 2인분 식사에 7150원 정도가 들었다. 2000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베트남 통일 이전 남베트남 수도였던 호치민의 식당을 찾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 북베트남 수도이자 현재 통일 베트남 의 수도인 하노이의 식당을 방문했다. [사진=앤서니 부르댕 인스타그램]

92년 한국-베트남 수교, 역사 사건 

베트남이 1992년 한국과 수교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외자와 외국 기업 유치의 물꼬가 본격적으로 터졌다. 베트남 정부는 이해 외국인 투자법을 대대적으로 고쳤다. 자본 유치를 위해 정부가 발 벗고 나선 셈이다. 이어 1995년 미국과 수교하고 아세안(아시아경제협력개발기구)에도 가입해 대외 개방과 글로벌 경제 네트워크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베트남은 미국과 관계증진에 힘썼다. 세계 최대의 경제를 가진 미국과 손잡아야 투자도 받고 산업도 일으키며 시장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바탕이 됐다. 1098년 베트남의 응우옌마캄 베트남 부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으며 그 뒤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이어졌다. 2001년에는 빌 클린턴, 2006년에는 조지 W 부시, 2015년에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각각 베트남을 찾았다. 2001년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은 임기 중 반드시 한번은 베트남을 찾은 셈이다. 2004년에는 미국의 유나이티드 항공이 베트남에 취항했다. 그러면서 베트남의 글로벌 경제 편입은 가속화했다.

북한 비핵화와 경제 개발에 중국이 역할을 자임하면서 남북한과 ·미국·중국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문재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미국은 북한에 베트남식 쇄신을 권했지만 시 주석은 중국식 개혁·개방을 권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북한 비핵화와 경제 개발에 중국이 역할을 자임하면서 남북한과 ·미국·중국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문재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미국은 북한에 베트남식 쇄신을 권했지만 시 주석은 중국식 개혁·개방을 권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베트남 글로벌화에 한국 기업 일조

베트남은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으며 2010년에는 미국 등과 환태평양경제협력체(TPP) 가입을 논의했다. 베트남은 성공적으로 글로벌 경제 편입을 이뤘다. 여기에는 대우와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도 큰 역할을 했다. 북한이 이런 기회를 얻어 경제적인 안정을 얻고 정상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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