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잘 구르는 바퀴 덕분에 여행이 즐거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92호 20면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84> 부가부 박서(Bugaboo Boxer)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목적으로 모인 곳이 공항이다. 제시간에 비행기 타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기차가 소실점을 향해 움직이듯 사람들은 비행기 제 좌석으로 달려간다. 공항에 머무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별의별 일들이 일어난다. 여행 횟수가 늘어날수록 추억 또한 늘어가는 이유다. 우리는 다시 마주칠 일 없는 사람들과 스치는 공항을 점점 친숙하게 여기며 산다.

이상하게도 미리 공항에 도착하는 여유는 생기지 않는다. 허겁지겁 도착한 터미널에선 모든 게 조급해지게 마련이다. 공항의 혼잡이 당신만 배려해줄 리 없다. 열 지어 선 사람들 틈에 끼어 순서를 기다려야한다. 탑승 수속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큰 짐은 따로 부치거나 포장을 해야 받아주는 곳도 있다. 한 손엔 캐리어를 또 한 손엔 쇼핑백을 들었다. 그래도 남은 짐은 어깨에 메고 낯선 공항을 두리번거려야 한다. 여행의 끝은 언제나 거치적거리는 짐의 숫자로 확인되게 마련이다.

출입국 담당 직원들은 친절하지 않다. 승객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취급하는 보안담당 파트의 몸수색에 자칫 빈정 상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이곳저곳을 통과하는 수속과정은 즐거울 수가 없다. 탑승수속을 겨우 마치면 혼잡한 터미널 안 출발 게이트를 찾는 일이 남아있다. 기내에 싣고 갈 짐은 여전히 끌고 다녀야 한다. 목이라도 축일 요량으로 들른 카페는 넘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주문하랴 가방 지키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겨우 찾은 게이트는 좁고 혼잡해서 앉을 곳도 없다. 인천 공항의 화물처리 시스템과 이동수단, 편의 시설이 얼마나 편리하고 잘 정비되어 있는지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 대한민국은 정말 좋은 나라다.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세계 어느 나라나 공항시스템은 같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과정의 번거로움과 복잡함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한다. 공항에서 여유 있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기업의 회장님이거나 여행사에서 모든 걸 처리해 주는 패키지 여행객 정도랄까. 이런 처지가 아니라면 여행의 기술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아기 태우는 유모차의 기술로 완성

해외여행을 할 때의 불편을 떠올려 보았다. 여행용 캐리어가 항상 문제였다. 지금까지 써 봤던 어떤 것도 백 퍼센트의 만족은 주지 못했다. 알루미늄이나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하드 케이스는 짐이 늘어났을 때 대처하기 어렵다. 별도의 가방 개수가 늘어나게 된다. 캔버스 천으로 된 소프트 케이스는 확장성에서 앞선다. 대신 바퀴와 손잡이가 시원치 않고 후줄근한 디자인도 마뜩찮다.

많이 쓰는 하드 케이스가 여행용 캐리어의 대세다. 확장의 불편은 ‘캐리어란 다 그렇지’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실제 써 보면 늘어난 짐의 고정문제가 번번이 문제를 일으킨다. 전용 세트가 아니므로 매끈한 캐리어와 별도 가방의 고정방법이 난감해진다. 캐리어와 가방 손잡이를 억지로 잡고 끌고 다녀야 한다. 잠시 주의가 산만해지면 미끄러져 떨어지기 일쑤다. 마음은 급하고 몸은 따라 주지 않는 일들이 공항에선 빈번하게 일어난다.

보완책이 있다면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거다. 하지만 공항에선 짐의 개수가 늘어나서 유리한 일이란 없다. 항공여행이란 평소 신경 쓰지 않던 짐과의 피곤한 신경전이기도 하다.

짐의 고정보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바퀴의 크기와 떨어지는 성능에서 오는 불편이다. 캐리어엔 보통 두 개나 네 개의 플라스틱 바퀴가 달려있다. 바퀴의 수납공간으로 용적이 줄어드는 걸 막기 위해 작은 걸 쓰고, 연결 축엔 아무런 처리 없이 끼워져 있다. 짐의 무게가 늘면 올라가는 무게중심 탓에 끄는 힘도 더 많이 들게 된다. 바닥이 매끈한 공항에선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캐리어는 건물 넘고 길 넘어 호텔 방까지 옮겨져야 제 할 일을 다 하는 물건이다. 아스팔트 도로에선 잘 구르지 않아 힘들고 소리가 요란해서 괴롭다. 돌로 포장된 유럽의 골목길을 지나 계단 있는 호텔에 묵어보시라. 지금까지의 캐리어가 얼마나 불편한 물건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잘 구르는 바퀴에 케이스를 끼우고 밀고 다니다

작년 가을 비엔나 공항에서 한 여성의 자태에 눈이 끌렸다. 검정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차림의 미인은 박쥐를 연상시키는 까만 캐리어를 밀고 다녔다. 사람과 캐리어가 합체된 듯한 조화로운 모습은 멋져도 너무 멋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미인의 캐리어는 특별하다는 걸 알았다. 분명히 손잡이를 끌지 않고 유모차 마냥 밀고 갔다.

신기하고 희한했다. 네덜란드의 부가부 박서(Bugaboo Boxer)란 제품이었다. 부가부란 회사는 유모차로 더 유명했다. 뭔가 연관성이 느껴졌다. 아기를 태우는 유모차의 기술이 여행용 캐리어에 적용되었다는 걸 눈치 챘다. 아무렴,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들이 덜컹거리는 유모차를 살 리 없다. 바퀴를 달아 굴러가는 물건이라면 자신 있게 만들 만했다.

기존 캐리어는 본체에 바퀴를 달았다. 부가부 박서는 분리된 바퀴에 케이스를 끼우는 구조다. 마치 컨테이너 트럭 마냥 트럭과 컨테이너가 떨어지고 붙어 기능성을 높여가듯. 잘 구르는 바퀴가 우선이고 여기에 짐을 실으면 되는 것이다. 본체에 바퀴를 단 기존 캐리어와 접근법이 전혀 다르다. 부가부 박서는 비로소 ‘어떻게 가지고 다닐까?’를 고민한 최초의 물건이 되었다. 간단해 보이는 아이디어는 1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부가부 박서는 평소의 불편을 흘려버리지 않았던 바퀴 전문가의 작품이다. 네덜란드의 디자인 역량과 기술이 뒷받침되어 세련되고 기능적 물건으로 완성됐다. 우레탄 고무로 만든 큼직한 바퀴는 베어링 처리가 되어 있어 원활하게 돌아간다. 여기에 크기별로 모듈화시킨 케이스를 바퀴 프레임에 변신합체 로봇마냥 붙이고 떼서 사용한다. 짐을 얹는 게 아니라 업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케이스는 서로의 홈에 쉽게 끼워지고 단단하게 고정된다.

큰 맘 먹고 산 부가부 박서를 밀고 며칠 전 도쿄에 다녀왔다. 바퀴의 성능을 실감했다. 공항 바닥에 기름을 바른 줄 알았다. 스윽 밀었을 뿐인데 저절로 굴러가는 듯한 부드러움이라니. 공항 밖 도로 바닥에 박힌 장애인 유도 블록이나 문턱도 쉽게 넘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오를 때에도 편했다. 가져간 두 개의 케이스는 이동할 때 한 덩어리로 뭉쳐졌다. 빠진 짐이 없는지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다. 손잡이 프레임엔 별도의 비상용 끈이 달려있어 면세점에서 산 쇼핑백을 편리하게 묶을 수 있었다. 평소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았던 애플 맥프로의 자리가 확보되어 좋았다. 엑스레이 투시기 앞에서 간만에 여유를 보인 이유다. 내가 찾고 있던 캐리어란 바로 이런 거였다. 캐리어가 바뀌었을 뿐인데 여행의 피곤함이 이토록 줄어들지 몰랐다.

부가부 박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회장님에겐 소용없다. 패키지여행 상품을 선호하는 알뜰한 이들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다. 바쁘게 움직이며 제 삶의 풍요를 채우는 이들에겐 눈이 확 뜨이는 잇 아이템이다.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