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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주창한 후쿠자와, 조선침략 이념을 실학으로 포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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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27면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⑨ 식민사관 극복하려다 대변

우키요에 화가 도시히데(年英)가 그린 1894년 ‘조선 경성전쟁(朝鮮 京城戰爭)’.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2010)에 실려 있다. 우리 역사책은 주로 문명과 개화, 혹은 실학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 일조각]

우키요에 화가 도시히데(年英)가 그린 1894년 ‘조선 경성전쟁(朝鮮 京城戰爭)’.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2010)에 실려 있다. 우리 역사책은 주로 문명과 개화, 혹은 실학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 일조각]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 시기에도 ‘실학’이란 말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어쩌다 한두 번 사용된 정도가 아니라 일간 신문과 잡지에 자주 쓰였다. 이때 실학이란 용어는 서양문물을 수용하는 이념적 근거로 활용됐다. 서양의 문물과 신식 학문을 실학으로 규정했다. 자연과학을 가리키는 격치학, 농업·상업·공업·광업을 중심으로 하는 실업학, 법률·경제·정치학 등이 모두 실학의 범주에 들어갔다. ‘실학시대’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였다. “금일이 가위 실학시대요 실력세계라. 실학이 무(無)하면 국가가 망하고 실력이 무하면 민족이 망한다.”(『태극학보』 1908.9.)

대한제국 말기 최대 화두 실학 #서양 문물과 신식 학문을 지칭 #일본식 문명개화의 또 다른 표현 #갑신정변 배후 조종한 후쿠자와 #민족은 배제한 채 실용성만 강조 #친일 개화파·언론이 적극 동조 #명치유신 찬양, 조선 망국 재촉

일본은 ‘서양 실학’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당시 ‘황성신문’을 보면, 재일 한국유학생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국하여 하기강습회를 열고 야구단을 설립하고 있음을 보도하면서 이들이 문명의 새 기운을 흡수하고 각종 실학을 수입한다고 평했다.(1909.7.23.) 일본으로 건너간 국비유학생의 현황을 소개하는 기사의 제목은 ‘유학생 실학’(1909.6.18.)이었다. 일본에 유학 가서 배우는 학문을 실학이라고 부른 것이다. ‘유학하다’를 ‘실학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노관범, ‘전환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

황성신문 ‘일본 유신 삼십년사’ 연재

1906년 황성신문에는 ‘일본 유신 삼십년사’라는 제목의 기획이 연재됐다. 명치유신의 사상가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와 관련해 실학을 언급하면서, 후쿠자와가 설립한 경응의숙(慶應義塾·게이오대학 전신)이 명치 초년 이래 ‘서양 실학’을 양성하는 연원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명치 초기 일본에는 서양 문물과 서양 풍속이 크게 유행하는 가운데 한자나 가나까지 폐지하려 하였고 실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미술까지 온통 서양을 추종하는 풍조가 일어났음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특집이 기획된 1906년은 어떤 해인가. 1904년 2월 대한제국을 침략한(갑진왜란) 일제가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밀어붙였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멸망이었다. 을사늑약 3일 후인 11월 20일자 ‘황성신문’ 2면에는 발행인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이 실렸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목 놓아 규탄한 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바로 그 ‘황성신문’ 지면에 일제의 명치유신을 화려하게 소개하는 특집을 게재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장지연은 을사오적을 ‘매국의 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고종황제가 승인을 거부한 을사늑약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논설이 인쇄돼 배포되던 날 장지연은 체포됐고, 신문사에는 무기 정간령이 내려졌다. 장지연은 65일간 투옥돼 있다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고, 황성신문은 2월 12일부터 속간됐다. 그렇게 황성신문이 속간된 후 나온 기획이 ‘일본 유신 삼십년사’였던 것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의 황성신문, 그리고 ‘일본 유신 삼십년사’를 연재한 황성신문 사이에는 큰 간극이 놓여 있다. 을사늑약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달라지는 논조는 대한제국 운명이 이미 기울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97년 대한제국 창건 이후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해온 근대화 개혁은 아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일제의 명치유신과 후쿠자와가 제창한 개화의 깃발만이 휘날리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실학은 다시 한국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서 실학이 실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논리로 실학을 도입했다고 흔히 말하곤 하는데, 오히려 실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대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재 사용되는 1만 엔 지폐 속 후쿠자와 유키치 .

현재 사용되는 1만 엔 지폐 속 후쿠자와 유키치 .

‘시일야방성대곡’과 ‘일본 유신 삼십년사’ 사이의 넘기 힘든 간극을 이어주는 고리가 실학이었다. 후쿠자와는 1870년대 일본의 문명개화를 설계한 인물이다. 문명개화라는 말 자체가 영어 ‘civilization’을 후쿠자와가 번역한 용어다. 후쿠자와는 영어 ‘science’를 실학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문명개화를 줄여 개화로 부르는데, 문명과 개화는 후쿠자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후쿠자와의 개화는 실학이란 말로 다시 포장되었고 그것은 전면적 서양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일제를 창구로 하여 우리에게 들어온 서양 실학은 일본화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실용성만 강조되는 가운데 주체가 배제된 실학이었다. 민족이 빠진 실학에 민족의 실핏줄을 이으려는 시도가 조선후기 실학자 발굴로 나타났다. 실학이 단순히 일본 닮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내부에 이미 그런 근대지향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런 움직임의 일환으로 ‘유형원-이익-정약용’이란 실학자 계보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20세기 초반의 실학 개념을 18세기 조선으로 소급 적용해 실학자의 계보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장지연에서 시작해 최남선과 정인보 등으로 이어졌다.

후쿠자와는 1884년 갑신정변 무렵부터 조선의 친일 개화파들(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갑신정변의 배후 조종자가 후쿠자와이기도 했다. 후쿠자와의 문명·개화·실학이란 포장 뒤에는 조선 침략도 포함되어 있음을 친일 개화파들은 간과했다. 후쿠자와는 적어도 1881년 무렵부터 무력을 동원한 조선 침략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일본의 안보 위협이었다.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말로 표현되었으며, 그런 조선 보호(침략)가 일본의 안보를 위한 길이라고 강변했던 것이다. 후쿠자와의 인기는 오늘날 일본에서도 이어진다. 가장 높은 가격의 1만 엔 지폐 속 초상화가 바로 그 얼굴이다. 100여 년 전 실학이란 포장 속에 그의 침략이념이 담겼다면, 오늘날엔 매일 만나는 일본의 지폐 속에 과거의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동학회, 실학 앞세워 조선시대 폄하

우리가 백번을 양보해 후쿠자와가 일본의 안보 위협을 걱정한 점을 일본의 입장에서 이해해준다면, 조선과 대한제국의 안보 위협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입맛대로 역사가 서술되었으니까 별도로 치더라도,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국 근대사 서술은 어떤가. 여전히 문명개화를 19세기 후반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파에서 개화파로 이어지는 흐름이 지금까지 한국 근대사 서술의 중심 줄기다. 문명개화로 명명된 근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광무개혁 성과가 보여주듯이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후쿠자와 식으로 말하면 일본보다 우리가 더 안보를 걱정해야 할 시기가 그때였다는 얘기다. 청나라를 물리친 일본이 조선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야욕을 노골화한 1894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의 독립과 개화는 둘 다 모두 달성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겠지만, 우선순위로 따지자면 민족국가의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더 앞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는 고종의 밀지를 중심으로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전쟁이 본격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전쟁의 양상은 당시 고종의 비밀자금으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가 유일하게 보도하여 지금까지 그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 시기에 ‘황성신문’은 의병들로 하여금 일체 무기를 버리고 각기 산업에 종사하며 실력을 양성하라는 논설을 쓰기도 했다.(1907.9.25.)

신·구 학문연구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유림계의 친일화를 목표로 1907년 12월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의 중요한 키워드가 실학이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08년 3월에 이미 기관지 ‘대동학회월보’에는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예송과 당쟁으로 가득한 조선시대에 실학을 강론하고 경제에 힘쓰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식이다. 이때 이미 일본은 식민사학자들을 동원해 조선의 역사를 폄하하도록 조작했는데, 곧 조선은 예송과 당쟁으로 정체된 사회였다는 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이었다. 문명과 야만을 축으로 하는 후쿠자와의 실학에 이미 조선 폄하는 예고되어 있었다. 전통적 유교에서 효를 중시한 것과 달리 대동학회는 또 충효를 강조했는데, 이는 일제가 ‘교육칙어’에서 충효를 내세운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망국의 시대 충효의 대상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일제 통감부의 한국 지배에 대해 인의로 비판하지 말고 충효로 복종하라는 뜻 아닌가.(노관범, 『기억의 역전』)

경술국치를 석 달 앞둔 1910년 5월에 나온 ‘대한흥학보’의 특집은 또 다른 측면에서 주목된다. 이때도 후쿠자와의 실학을 소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민적 교육’이 시급하다고 했다. 후쿠자와가 일으킨 실학 교육만이 능사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공민 교육도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실학과 실용과 실업이라는 미명 뒤에는 일본의 한국 지배정책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던 것이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자문 전문가=한영우·오금성·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장득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참고자료
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청계, 2017.
노관범, 『기억의 역전』, 소명출판, 2016.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이태진·김백철 엮음,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상·하권, 태학사, 2011.
강상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 논형, 2007.
고야스 노부쿠니,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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