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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트럼프보다 나은 협상 상대는 없다는 걸 알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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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호 29면

6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왼쪽)이 방문 첫날인 6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과 회담을 하고 있다. 이날 회담은 2시간 45분간 이뤄졌다. 두 사람은 7일엔 6시간에 걸쳐 회담과 실무 오찬을 했다. 북한 외무성은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을 떠난 후 ’강도적 비핵화 요구“란 입장을 냈다. [AFP=연합뉴스]

6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왼쪽)이 방문 첫날인 6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과 회담을 하고 있다. 이날 회담은 2시간 45분간 이뤄졌다. 두 사람은 7일엔 6시간에 걸쳐 회담과 실무 오찬을 했다. 북한 외무성은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을 떠난 후 ’강도적 비핵화 요구“란 입장을 냈다. [AFP=연합뉴스]

북한 비핵화 과정에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말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건 상식이지만 자기실현적 예언같이 보인다. 디테일의 입구에서 악마를 만난 것 같다.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CD)에 포괄적으로 합의한 북한과 미국이 합의의 이행을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6~7일 평양 방문이다.

삼지연 감자밭에 간 김 위원장 #평양 찾은 폼페이오 ‘빈손’ 논란 #미국 내 반트럼프 진영에선 #“돼지 입에 루즈 바르는 것” 혹평 #단 한번의 실무협상 성과 없다고 #‘실패’ 단정은 우물서 숭늉 찾는 격 #가다 서다 반복할 긴 협상의 출발 #트럼프 말한 비핵화 20%까지 가야

폼페이오는 평양을 떠나면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의 협상이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평양을 떠나자마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폼페이오가 강도 같은(gangster-like) 요구만 쏟아냈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폼페이오가 북한에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 또는 새로 등장한 표현으로 FFVD(최종적이고 충분히 검증된 비핵화)를 요구하면서 북한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보상은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폼페이오는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을 기대하고 갔다. 그러나 그 시간 김정은 한가하게 백두산 삼지연 감자밭에서 감자 생산에 관한 현지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감자밭에서 김정은이 실제로 한 일은 평양의 김영철 협상팀을 원격조종하는 것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폼페이오방문 기간에 평양을 떠나있는 것 자체가 힘 있는 메시지였다. 폼페이오가 무엇을 들고 오는가를 알았다는 증거다.

디테일 협상 입구에서 부터 악마 만난 격

트럼프의 모든 정책을 비판하는 미국 주류언론들, 리버럴과 보수 싱크탱크의 전문가들, 과거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주도했거나 참여했던 사람들, 트럼프가 김정은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의회 의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비판의 소리를 쏟아냈다. 2000년대 6자회담 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를 대표하여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빅터 차 교수(조지타운대)는폼페이오의 평양에서의 노력을 “돼지 입에 루주 바르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북한 붕괴론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다.

트럼프 비판의 기회를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CNN은 김정은 위원장은 완전한 비핵화 프로그램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국방정보국(DIA)의 판단이라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국방정보국은 북·미 정상회담 후에도 북한은 핵탄두와 관련 시설을 은폐하려 한다고 판단한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 연구소의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함흥의 고체연료 탄도 미사일 공장의 외부 공사가 완성되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김정은 위원장은 싱가포르의 약속, 특히 자신과의 악수를 지킬 것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그러나 트럼프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비핵화 협상보다는 북한 핵·미시일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선호하는 사람들, 트럼프의 모든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는 국내 일부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초보적인 사실 하나를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김영철-폼페이오의 이번 평양 협상이 싱가포르 합의 이행을 위한 고위 실무급의 첫 회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어렵다는 것,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곳곳이 지뢰밭이라는 것, 명절 귀성길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들처럼 가다 서기를 여러 번 되풀이할 것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다. 단 한 번의 고위 실무급 협상이 손에 잡히는 성과 없이 끝났다고 해서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속았다, 김정은은 비핵화할 의사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우물가에 숭늉 찾는 사람의 행동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 성명도 폼페이오가 들고 온 미국의 요구를 강도 같은 짓이라고 비난하면서도 트럼프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했다. 김영철과 폼페이오를 통해서 김정은과 트럼프는 친서도 주고받았다. 2018년 중에 남북 3차와 북·미 2차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다. 남북 정상 간의 핫라인과 북·미 정상 간 핫라인의 가동이라는 큰 자산도 남아있다.

볼턴 등 ‘비핵화 방해세력’ 회담 무산 시도

10일 북한 관영 매체가 보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인근 삼지연 감자밭을 찾은 모습. 김 위원장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의 만남을 피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연합뉴스]

10일 북한 관영 매체가 보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인근 삼지연 감자밭을 찾은 모습. 김 위원장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의 만남을 피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연합뉴스]

비핵화 과정에 관한 보도가 워싱턴의 회의론(scepticism)과 트럼프 공격에 초점을 맞춰진 결과 정작 중요한 문제가 논의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폼페이오는 평양을 떠난 뒤 도쿄를 거쳐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거기서 폼페이오는 베트남의 기적을 말하면서 이 기적은 김정은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미국이 10년 전쟁을 굴욕적인 패퇴로 끝낸 나라다. 1975년 종전 후 20년 만인 1995년 두 나라는 국교를 정상화했다. 3년 전쟁을 치른 북·미, 아직도 기술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있는 북·미도 베트남의 기적을 북한에서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다.

베트남은 1986년 정치적으로는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도이모이 개혁정책을 시작하여 연평균 7~8% 수준의 경제성장을 기록하여 ‘동남아의 용’으로 부상하고 있다. 개인소득 3000달러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10년 안에 실현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그 개인소득 3000달러다. 북한의 2016년 기준 개인소득은 1340달러다.

김정은을 향한 폼페이오의 하노이 발언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이 어떤 경제개발 모델을 선택하느냐는 비핵화를 하고 난 다음의 문제다. 미국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이 핵·미사일을 포기하면 얼마나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지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여줬다. 중국과 견원지간(犬猿之間)인 베트남에서 폼페이오가북한에 베트남 모델을 말한 것은, 김정은과 시진핑이 북·중 혈맹관계를 복원하여 중국의 비핵화 과정 개입이 북·미 협상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지금 중국을 자극하고 북한의 냉소를 자아내는 결과밖에 안 된다. 폼페이오는 경제개발 모델보다는 비핵화 모델을 말했어야 한다.

인도에 이어 싱가포르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보도된 스트레이츠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의 연내 실현을 다시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종전협정 체결 65주년이 되는 2018년 안에 종전선언을 하는 것이 한국 정부의 목표라고 말했다. “종전선언은 상호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관계로 나아가겠다는 공동의 의지를 표명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종전선언에는 하나의 리스크가 따른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김정은과 시진핑은 세 번이나 만나 소원하던 관계를 회복했다. 트럼프와의 회담을 앞두고 김정은은 기댈 언덕이 필요했고, 시진핑은 중국이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소외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이 비핵화 과정의 어느 단계에 참여하는가는 비핵화의 속도를 좌우한다. 김정은은 중국의 의사에 반해서 중국을 제외한 남·북·미 3자에 의한 종전선언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올가을 유엔 총회에서 남·북·미·중 4자 종전선언이 성사된다면 그것은 중국의 조기 비핵화 과정 참여를 의미한다. 상징적 정치 선언의 대가로 중국의 조기 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무역 전쟁으로 세계 거의 모든 주요 국가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특히 미·중 무역 전쟁은중국에 대북 제재망에 큰 구멍을 뚫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미 동·서해 상에서는 북·중 밀무역이 활발하지만 중국 정부는 묵인하고 있다. 북한의 500개가 넘는 장마당의 거래 물품들의 상당 부분이 해상 밀거래로 조달된 것들이다.

폼페이오의 베트남 발언, 중국 자극 우려

그러나 아직 가장 경계해야 할 비핵화 방해세력은 때를 기다리면서 몸을 낮추고 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존 볼턴이다. 그는 부시 정부의 ABC(Anything But Clinton)라는 클린턴 정책 죽이기를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다. 그의 두툼한 저서 『굴복은 선택일 수 없다(Surrender Is Not an Option)』을 보면 그는 제네바 합의 폐기에 대한 확신에 찬 소명의식을 가지고 군축담당 국무차관에 취임했다.

볼턴은 세상사를 선악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전형적인 매니키언(Manichean·마니교도)이다. 악은 파괴의 대상이지 협상 상대가 아니다. 그의 매니키어니즘은 그대로 북한에 적용된다. 볼턴이 북한 핵탄두와 물질을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반출하여 미국인들 손으로 해체한 리비아 모델을 주장하여 싱가포르 김·트럼프 회담을 무산시킬 뻔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지금은 트럼프가 대북협상의 전권을 폼페이오에게 맡기고 볼턴의 개입을 차단하고 있다. 볼턴은 때를 노린다.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국(EAP)를 제외한 정부 도처에 그의 이념적 전우들이 있다. 부통령 마이크 펜스는 언제든지 볼턴과 행동을 같이할 사람이다. 의회에도 우군이 많다.

트럼프와 폼페이오는 나라 안팎에서 보수·강경론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김정은은 핵·미사일  만으로 체제를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현명한 판단을 했기 때문에 평창 이후의 역사적인 전환을 추동한 것이다. 김정은은 알아야 한다. 트럼프같이 덜 합리적이고 충동적이고 성취욕 강한 미국의 대통령, 이보다 더 좋은 협상 파트너는 없다는 사실을. 트럼프는 비핵화가 20% 선을 넘으면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우선 거기까지라도 속도를 내야 한다.

김영희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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