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기』설움딛고 끝내 세계정상에|구기서 첫 「금」딴 여핸드볼…오늘이 있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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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구기사상 첫 올림픽금메달의 장거를 이룬 「동방의 마녀」 여자핸드볼대표팀. 4천만 국민이 열광하는 가운데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우뚝 선 한국의 자랑스런 낭자군은 북받치는 감격에 마음속 깊이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꿈에 그린 금메달이었던가. 비인기 종목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뜻한 박수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이들 앞에 한꺼번에 몰려든 영광의 스포트라이트는 부담스러웠고 이 때문에 감회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 정작 그 속에는 세계 정상임을 확인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각고의 지난 일들이 한순간에 온몸을 감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늘 속에 꽃피운 오늘의 결실이 있기까지는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 대표팀 골게터인 성경화는 LA올림픽 출전 멤버. 올림픽은 메달의 감격을 안고 금의환향한 성경화에겐 또 다른 무거운 짐이 기다리고 있었다. 85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서울)가 바로 그것. 이 때문에 서둘러 구성된 주니어 멤버가 현 대표팀의 주축이다.
성경화를 비롯, 송지현(GK) 김현미 김춘례 김명순 김경순 등.
뒤에 기미숙 임미경이 합류, 진용을 갖춘다. 85년1월이었다. 그첫번째 시험무대라 할 85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주니어팀은 소련에 이어 2위를 차지, 가능성을 인정받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
1년 후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제9회 세계선수권대회는 한국여자핸드볼의 현 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준 확인 무대였다. 참가 16개국중 11위. 비록 대표팀이 윤범순 김옥화 정순복 등이 물러나고 신진주니어들로 세대 교체 됐다고는 하나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여자핸드볼은 자체프로그램을 마련, 훈련에 박차를 가했고 마침내 올림픽금메달의 결실을 맺게된다.
그러나 영광 뒤켠엔 이들이 쏟아 부은 땀과 눈물이 엉겨있음을 본다. 결코 하루아침에 얻은 행운이 아닌 것이다.
서울올림픽 7백일 강훈에 돌입하면서 막이 오른 여자핸드볼대표팀의 훈련내용은 말 그대로 「지옥의 강행군」에 다름없었다. 아침6시 기상과 함께 새벽·오전·오후 세 차례에 걸친 하루 8시간의 훈련스케줄은 조금도 차질없이 계속되었던 것. 일요일 외출도 절대 금지였다. 목표가 분명한 이상 한시도 한눈팔 겨를이 없다는 고병훈 감독 특유의 고집탓이기도 했다.
『살아도 코트에서 살고 죽어도 코트에서 죽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선수·코칭스태프의 다짐은 15인의 코트야생마들을 쇠사슬만큼이나 단단하게 엮어놓았다. 「선체력 후기술」을 고집하는 고감독의 훈련스케줄에 따른 하루 2시간씩의 체력훈련은 분명 스무살 처녀들에겐 무리였지만 훗날 핸드볼선수였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독려로 다독거리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손엔 물집이 잡히고 다리부상이 끊이질 않았지만 누구도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심상 훈련으로 자신감을 키우고 야간등반으로 담력을 키우는 훈련 또한 어김없었다.
실전을 경한 파트너훈련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영동고·고려고 등 남고부를 상대했는데 그때마다 스코어는 3∼4점차의 리드였다. 매주 실시되는 불암산 눈물고개 등반훈련만도 무려 1백여 차례.
한시도 거른 적이 없었고 그때마다 남자선수를 따라잡는 억척스러움을 보였다. 이 때문에 얻은 별명이 「태릉 억순이들」.
근7개월에 걸친 훈련이 주효, 한국여자핸드볼대표팀은 87년8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는가하면 세계7강이 겨룬 FM컵국제대회(노르웨이)에서도 동구권의 강호 동독·유고를 격파하며 4위에 랭크되는 등 놀라운 경기력 향상을 보였다.
정작 대회에 임해서는 죄어오는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손미나의 일기장을 들춰보자.
『인기도 없고 인정해 주지 않는 핸드볼을 시작하여 우리들은 열심히 참으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그런데 오늘 유고전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했다. 마냥 떨리기만 한다. 뼈를 깍는 아픔이다. 입술이 타고 눈물이 나온다.
마음껏 울고싶어도 후배들 앞이라 눈물 또한 보일 수도 없는 일, 미칠 것만 같다. 내가 좀더 정신력을 강화시켰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주여 도와주옵소서….』(9월23일)
패배의 아픔을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털어놓은 한 선수의 진솔한 고백과 소망은 선뜻 동정심을 열게 하는 대목이 아닐는지. 갓 스무고개를 넘긴 이들 역시 인간적인 고뇌와 삶의 강한 애착을 함께 나누고있는 것이다.
『모든 영광은 전적으로 선수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강훈 속에 무던히도 잘 참아주었고 끝까지 믿고 따라와 준 선수들이 자랑스러울 따름입니다.』
고병훈 여자감독의 말대로 여자핸드볼의 올림픽 금메달은 오로지 오늘의 영광을 별러온 지독한 연습벌레들이 이룩한 최고의 걸작품이다. 비인기종목의 그늘 속에 이룬 찬란한 영광은 분명 그들 몫이다. <전종구 기자>
▲78년 제7회 체코세계 선수권대회 본선 예선 리그 탈락
▲79년 모스크바올림픽 출전권 획득(불참)
▲81년 제3회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4위
▲82년 제8회 헝가리세계선수권대회 6위
▲83년 제4회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3위
▲84년 LA올림픽 2위(공산권불참)
▲85년 제5회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 2위
▲86년 제9회 네덜란드 세계선수권대회 11위
▲87년 제7회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4위
▲88년 서울올림픽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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