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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의 힘까지 짜낸 한국 … 마테우스 “너흰 이길 자격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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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차범근의 월드컵 붐붐 <2>

한국-독일전 후반 추가시간, 선심이 오프사이드 반칙으로 선언했던 김영권의 슛이 비디오 판독(VAR)끝에 선제골로 인정되자 신태용 감독(왼쪽)과 한국 축구대표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독일전 후반 추가시간, 선심이 오프사이드 반칙으로 선언했던 김영권의 슛이 비디오 판독(VAR)끝에 선제골로 인정되자 신태용 감독(왼쪽)과 한국 축구대표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친구야
너무나 잘 싸운 너희 팀에 축하를 보낸다.
너희는 이길 자격이 있었어. 우리는 너무나 무기력했고 느렸어.
안부를.
아네테와 라이너가.

경기 전 슈뢰더 “5골 차 승리” 장담 #경기 뒤 독일 친구들 “우린 무기력” #자신의 한계 속도 넘은 선수들에 #“하면 되잖아” 쉽게 말하면 안 돼 #후원·팬 떠나는 한국 축구의 현실 #변화 없으면 다음 월드컵 기약 없다

Ihr Lieben
Gratulation für eure großartige kampfende Mannschaft. Ihr habt den Punkt verdient. Wir waren viel zu schwach und langsam.
Liebe Grüße
Annette und Rainer.

러시아 현지 시간으로 27일 오후 6시52분 독일과의 경기에서 한국의 첫 골이 들어가자마자 친구가 보낸 문자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언론담당관이었으며 독일 축구전문지 키커 편집장을 지낸 라이너 홀츠슈와 그의 아내 아네테. 독일에서 TV로 지켜보던 친구뿐만 아니라 운동장에서 만난 로타어 마테우스 같은 독일 축구의 전설들도 똑같이 말했다. 너희는 이길 자격이 있는 경기를 했다고. 친구들의 축하 문자가 아침 식탁까지도 계속 딩동! 딩동거리고 있다.

마테우스(左), 슈뢰더(右)

마테우스(左), 슈뢰더(右)

차범근(오른쪽) 전 축구대표팀 감독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사진 차범근 전 감독]

차범근(오른쪽) 전 축구대표팀 감독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사진 차범근 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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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 만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독일이 5골 차로 이길 것”이라고 했다. 나는 “두고 봅시다. 우리가 이깁니다!”라고 맞섰다. 경기를 마친 뒤 다시 만난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워낙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니 독일 대표팀의 패배와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만약 독일을 무너뜨린 상대가 우리나라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며칠은 의기소침해 있었을지 모른다.

묵고 있는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나보다 일찍 내려간 아내는 건너 테이블에 독일축구협회장 일행이 식사를 하는데도 뭐라 할 말이 없어 못 본 척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고 한다. 나 역시도 마주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카잔=임현동 기자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카잔=임현동 기자

경기를 마치고 우리 대표팀 라커룸에 내려갔다. 울보 흥민이는 말할 것도 없고 성용이, 현수, 자철이, 주호…. 우리 선수들을 한 번씩 안아주는데 내 품에 안겨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그간의 맘고생이 고스란히 나에게 박혀 왔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독일. 4년 전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 너무나 견고해 ‘전차군단’이라 불리는 나라. 그래도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게 축구고, 우리 선수들이 그걸 해냈다. ‘대회 기간 중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오로지 월드컵을 있는 그대로 맘껏 즐기겠다’던 나의 희망은 틀어지고 말았지만 대회 기간 내내 진지하게 축구 이야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월드컵도 나에게는 처음이다.

전술과 작전, 선수 기용 같은 지극히 축구적인 이야기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다 보니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할 때면 응원단장처럼 “무조건 응원해 달라”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경기를 앞두고는 대표 선수들을 비난하는 일부 팬에게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축구팬들께 죄송했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전을 2-0으로 승리한 뒤, 손흥민이 팬들을 향해 박수치고 있다. 임현동 기자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전을 2-0으로 승리한 뒤, 손흥민이 팬들을 향해 박수치고 있다. 임현동 기자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공중볼을 다투다 공을 잡는 골키퍼 조현우. [연합뉴스]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공중볼을 다투다 공을 잡는 골키퍼 조현우. [연합뉴스]

경기를 앞두고 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기다렸지만 우리 축구의 현실은 문제가 많다. 인정한다. 대한축구협회도, 현장 관계자들도, 선수도, 나를 비롯한 우리 축구인들도 지금처럼 변화를 거부한다면 다음 월드컵을 기약하기 어렵다. 기업들은 축구에서 발을 빼고 있고 운동장을 찾는 팬들은 동남아시아의 관중보다도 적은 상황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선수들은 일본·중국으로 진출하던 시절을 지나 이젠 태국·베트남·말레이시아로 나가고 있다. 우리 선수들이 K리그보다 동남아 국가에서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겠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 축구는 물도 영양분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굵은 열매를 기다리는 격이다. 손흥민 같은 선수가 나왔다는 것은 축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잘 키운 게 아니고 그냥 생겨난 거다. 선물받은 거다. 하지만 선물은 항상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전을 마친 뒤 둥글게 모여 서로 격려하는 축구대표팀 선수들. 카잔=임현동 기자

28일 열린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독일전을 마친 뒤 둥글게 모여 서로 격려하는 축구대표팀 선수들. 카잔=임현동 기자

지난 밤 독일과 경기에 나선 우리 선수들은 한계 속도를 넘어서 달렸다. 엔진에는 열이 나고 파일럿은 어질어질하다. 그런 선수들에게 “거봐. 그렇게 하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내장 속에 고여 있던 에너지 하나까지 모두 소진한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우리 선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길 바란다. 그들은 정말 힘든 일을 해냈다.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간의 고난이 떠올라 마음 아픈 밤이기도 했다. 선수들 곁에서 도운 우리 아들 두리에게도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

카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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