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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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새로운 것을 보았다. 춤추고, 장구치는 얘기가 아니다. 낙하산이나 굴렁쇠얘기도 아니다. 고놀이며 화관무는 그전에도 많이 보아 왔다.
춤추고 노래하고 함성을 지르는 어린이들, 소년 소녀들, 젊은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라. 하나같이 웃고 미소짓고 있다. 우리에겐 그것이 더 큰 감동이었다. 그처럼 다소곳하고 감미롭게 웃는 모습을 우리는 일찌기 본 일이 없었다.
이들은 벌써 1백여일을 두고 운동장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같이 연습을 해왔다. 세상에 똑같은 일의 반복처럼 하기 싫은 것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형무소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 있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이다. 이쪽 흙을 저리로 옮기고, 저쪽 흙을 다시 이리로 옮기고 하는 일은 죽기보다 싫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웃는 일에 인색하다. 언젠가 선명회 어린이합창단 지휘자로부터 들은 얘기다. 노래를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쉬운데 무대에 올라서서 웃으며 노래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더라는 것이다. 이 합창단 초창기엔 웃는 연습만 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외국어린이, 가령 스위스나, 프랑스 어린이들의 경우도 그랬을까. 우리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공부하라고 닦달하는데는 이골이 나있지만, 웃으면서 얘기하고, 웃으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음식먹는 법을 가르치는 일은 없다.
중국의 문필가 임어당은 「카이제르·빌헬름」이 웃을 수 없었던 탓으로 독일제국을 잃었다고 했다. 독재자들이 웃음을 감추지 못할 때가 있는데 독선과 정복의 순간이다. 하지만 그런 웃음 뒤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감추어져 있는가. 그런 웃음은 차라리 울음이다.
철학자 「칸트」는 『웃음은 어렸을때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얼굴 모양도 맑고 부드러우며 정다와진다는 것이다.
「칸트」는 잘 웃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도리어 웃음을 갈망하게 했는지 모른다.
철학자 「니체」 역시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사람은 나중에도 웃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미래에 웃을 수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분명 어제 우리의 모습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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