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분노 배설장 된 청와대 게시판, 이대로 둘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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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공론장인가? 분노 배설장인가? 청와대 청원 게시판이 일부 누리꾼의 도 넘은 인신공격과 악성 글들로 혼탁해지고 있다. 최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러시아 월드컵에서 2연패한 우리 대표팀 선수들을 비난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실수가 잦았던 장현수 선수 등을 놓고 “(가족과 함께) 추방하라” “영구제명시켜라” “국가대표 선발 과정의 비리 의혹을 파헤치라” 등 악플 수준의 ‘청원’이 줄을 이었다. 예멘 난민과 관련해서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기반한 비이성적 ‘난민혐오’가 청원이란 이름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페미니즘 처벌법을 만들라” “(페미니스트 행동을 한) 가수 수지를 사형시켜라” 같은 ‘여혐’ 게시글도 많다. “나이도 많고 여자 만나기 힘드니 국가에서 미팅을 주선해 달라” “고구마가 너무 달아서 장사가 안 된다” 같은 낙서장 수준의 황당한 민원도 있다.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은 이에 대해 지난달 30일 “청원 게시판이 놀이터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분노를 털어놓을 곳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민들이 분노를 발산할 놀이터가 굳이 청와대 게시판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지금처럼 익명의 숲에 숨어서 여타 포털 사이트와 진배없이 혐오 발언이나 화풀이를 일삼는 장이 돼버린다면, 이 공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스스로 저버리는 일이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를 폐쇄해 달라” “실명으로 운영해 달라”는 청원까지 올라오는 상황이다.

그간 청와대는 ‘소년법 개정’ ‘낙태죄 폐지’ 등 20만 명 이상 참여한 청원 36개에 대해 답변했고, 일부는 실제 정책에 반영하는 성과를 냈다. ‘자유로운 대국민 소통’이라는 근본 취지는 잘 살리면서 게시판 문화가 변질되지 않게 책임 있는 관리와 개선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