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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금융시스템, 시장 원리 무시 … 대출금리 인하 압박하는 금감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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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고란 경제부 기자

고란 경제부 기자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민간 출신이다. 금융당국이 시장에 개입하는 관치(官治)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2016년 저서 『비정상경제회담』에서는 “금융시장에 금리와 수수료 결정권을 돌려주고 유효경쟁이 이뤄지도록 유도하는 게 오히려 정부의 책임이라고 본다”며 “정부는 좀 더 철저히 감시하고 감독해야 할 재벌기업은 놔두고 오히려 내버려 둬야 할 금융회사와 시장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사실 확인 없이 #“과한 이자 물린 사례 수천 건” 발표 #은행들 부도덕한 집단으로 규정 #시장 개입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금융당국의 수장이 된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다. 최근 금감원은 시장에 적극 개입해 대출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있다. 금감원은 올해 초부터 9개 시중은행의 대출금리 산정체계를 점검했다. 그 결과 일부 은행에서 고객에게 부당하게 높은 대출금리를 부과한 사례를 ‘다수’ 적발했다고 지난 21일 발표했다. 고객 소득이나 담보를 은행 전산 시스템에 입력하지 않거나 규정상 최고 금리를 부과하는 등의 수법을 써, 대출자에게 정상보다 많은 이자를 물렸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어떤 은행에서 몇 건의 ‘조작’을 적발했는지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단순 실수인지 고의인지에 대해서도 결론을 못 내렸다며 답을 피했다.

지난 주말엔 “은행에서 수천 건의 조작이 있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 정도면 실수로 보기 어렵다. 고의라면 단순히 더 받은 이자를 돌려주는 선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실무자는 물론이고, 경영진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금감원의 입장은 모호하다. 재차 확인을 요청했지만 “수치 확인은 해 줄 수 없고 ‘고의’라고 말한 적 없다”는 답만 들었다.

소비자들은 이미 은행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낙인 찍었다. 올 1분기에만 10조원에 육박하는 이자수익은 그 간접 증거다.

한 은행 관계자는 그러나 “그런 조작 사례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뭉뚱그린 발표로 금감원이 은행 전체를 도둑으로 몰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은행원이 자기 목숨 걸고 그런 조작을 할 수 있겠느냐”며 “결국 대출금리 낮추라는, 적어도 더는 올리지 말라는 사인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어쨌든 대출금리가 낮아지면 소비자 편익이 증대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부자 은행 몫 좀 뺐으면 어떠냐는 입장이다. 윤 원장도 지난 15일 “금융회사가 수준 높은 리스크 관리 능력을 발휘해 가계·중소기업과 고통을 함께해야 한다”며 은행들의 ‘고통 분담’을 강조했다.

윤 원장은 앞서 지난 12일 “대출금리는 시장 원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한다”며 “하지만 산정 과정에서 합리성이 결여돼 있다면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금융당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지 않냐’는 논리다. 어째 ‘관치의 화신’으로 불리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시장 자율에 의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굳이 관치가 필요하겠느냐”는 해명과 비슷하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뀐 지금, 관치의 필요성을 옹호할 수 있다. 하지만 관치를 하겠다면 민간에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확정되지도 않은 사안을 공개해 여론몰이 식으로 은행을 다그치는 식은 곤란하다. 이는 금융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불러올 뿐이다. 관치, 하려면 제대로 해라.

고란 경제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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