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양승태 재임 때 쓰던 컴퓨터 못 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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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법원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임 중 쓰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넘겨달라는 검찰 요구를 거부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범죄 관련 등 제한적 자료 제공키로 #검찰,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 가능성

대법원 관계자는 24일 “내부검토 결과 법원행정처라고 해도 대법원장, 대법관 등이 쓰던 하드디스크 일체를 임의로 처분할 권한은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에 넘겨줄 법적 근거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그렇다고 법원이 나서서 이들의 하드디스크를 뒤진 다음 ‘이건 주고 이건 못 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등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당시 법원행정처가 정권에 유리한 판결들로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을 규명한다며 지난 주 관련 인사들의 컴퓨터 제출을 요구했다.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컴퓨터 등도 포함됐다.

법원 관계자는 “엄격한 적법절차를 따르지 않고 검찰에 자료를 넘길 경우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이 오히려 비밀침해, 직권남용 등의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범죄 혐의와 직접 관련이 있고 ▶수사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며 ▶법원행정처가 제공할 수 있는 권한 내의 자료에 한해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정했다.

법원 예규인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 등도 참고하고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 간부가 쓴 법인카드, 관용차량 사용내역 등도 검찰에 주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재판 거래’ 의혹 관련자들의 동선 파악을 위해 이를 함께 요구했지만, 대법원은 범죄 혐의와 직접 관련성이 적다고 보고 있다.

대법관 관계자는 “검찰이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 6년 동안(2011년9월~2017년9월) 법원행정처가 관리한 법인카드(업무추진비 등) 사용내역 전체를 다 달라고 했다”며 “사용자를 특정하지도 않아 이를 다 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고등 부장판사(차관급) 이상에게 전용으로 배정된 관용차 사용 내역서도 보관 중인 게 없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대법원은 이르면 이번 주 중 자체 조사단이 발견한 410개 컴퓨터 파일이나 이것이 저장돼 있던 행정처 일부 컴퓨터, 상고법원 진행 관련 자료, 법원 정기인사 자료 정도를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검찰은 제기된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선 물적 증거를 최대한 폭넓게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검찰이 필요한 파일, 자료 등을 얻기 위해 강제수사(압수수색 영장 청구 등)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25일 오전 10시 양 전 대법원장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한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법원노조) 조석제 본부장을 소환조사한다. 대법원 내부에서도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과 당시 법원행정처장 등의 컴퓨터가 꼭 필요하다면, 형사소송법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자료 요청이 아니라 서울중앙지법에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청구를 하라는 것이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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