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과 자존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하나의 불유쾌한 환각이 요즈음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얼핏보기엔 대단찮은 것 같기도 한데 며칠 전에 있었던 두 가지 각각 다른 사건이 하나로 중첩되면서 내겐 의미심장하게만 보인다.
서울서 열린 국제 펜 대회에 참석했던 이 모임의 대표 격인 외국인이 폐막 식을 끝내고 한 회견에서 그 동안 받은 환대를 오히려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이 매우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면서도 『외국인을 지나치게 환대한다는 것은 허약하게 보일 수도 있으므로 그러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고 점잖게 충고를 하더라고 한다.
우리 속담에 「뭐 주고 뺨맞는다」더니 바로 그 꼴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곧이어 그 다음날 발생한 것이다.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마중하러 집 앞 길가에 나와있던 30대 임신부가 청천하늘에 벼락도 유분수지 길 가던 10대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병원에 입원까지 한 사건이다.
무심히 서있는 여인을 뺨을 때리고 지나갔고 여인이 이에 항의하자 되돌아와 뭇매를 때린 것이다. 이 아이들이 말만 10대였지 덩치는 한국인 어른보다 더 큰 외국인들이었다는 데서 어이없다 못해 충격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때와 장소, 동기와 시말이 전혀 다르고 직접적인 연관성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가 묘하게 연결돼 하나로 중첩되는 환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 임신부를 구타한자가 외국인 10대들이 아니라 앞서 한국인의 과잉친절을 비판한 외국작가로 바뀐다.
그런가 하면 과잉친절을 나무라는 것이 바로 한국여인을 구타한 노랑머리 애숭이들로 엉뚱하게 착각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착각과 환상이 과연 「엉뚱한」, 순전히 개인적인 망상 때문일까.
이 두 가지 사건의 뿌리는 하나고 그 뿌리 밑바닥에서 한국인을 얕잡아 보는 기분 나쁜 냉기 같은 것을 감지하는 것이 필자의 과민성 피해망상증 때문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 국민에게는 은연중에 외국인을 경원하고 그들 앞에서 까닭 없이 주눅드는 버릇이 있다.
그 연원을 전문가들은 역사에서 찾는다. 수천 년 동안 주변강국의 침략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사대사상이 몸에 젖고 외국인 앞에서 무턱대고 위축되는 것이 체질화됐다는 분석이다. 외침자의 무자비한 살륙과 약탈에서 살아남기 외해서는 비굴하리 만큼의 친절과 환대가 몸에 배었을 법도 하다.
더구나 근세에 들어 일제방년동안 「스스로는 국가를 영위할 능력이 없는 미개민족」 이라는 침략자들의 병탄과 탄압논리에 의해 세뇌 당했던 우리 민족은 자기비하의 늪에서 눈을 감고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외국인이면 무조건 우러러보는 상대적 조건반사에 길들여진 것 같다.
8·15광복도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유엔군이 아니었더라면 동족상잔에서 우리가 휴전선까지 복귀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전화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미 공법480호 덕택이 아니었던가.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이 적화되리라는 현재의 안보논리 또한 외세의존형이고 보니 외국인에게 「봉」노릇 하는 근성의 뿌리는 잘못된 역사의식뿐만 아니라 현실인식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고도 깊다고 하겠다.
굽실거리고 아첨할수록 상대를 짓밟고 경멸하는 것이 양의 동서를 막론한 세상인심이 아니던가. 지나친 환대에 대한 비판과 파란 눈의 10대들의 구타사건이 가져온 민족적 자존심의 손상은 여기서부터 치유의 실마리를 찾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외국인에게 일방적인 동정이나 이해, 또는 아량을 구걸할 처지에 있지 않다. 비굴한 친절과 환대를 베풀어야 살아갈 수 있는 허약한 국가가 아니다. 어느 강대국과도 1대1로 협조하고 거래하는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단계에 있는 독립국가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제 서울올림픽 개막이 임박함에 따라 수많은 외국인들의 눈길과 발길이 한국을 향하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전혀 교류가 없던 공산국가 사람들까지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친절을 베풀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다』 고 서울 발 외신은 비아냥거리고 있다.
그들이 왜 우리를 찾는가. 올림픽 참가와 관람을 위한 선수거나 관광객일 뿐이다. 목적이 그것에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우리를 특별히 좋게 보고 선심을 쓰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들의 어떤 「필요성」 때문에 온다. 실리와 이문을 찾아 타산을 맞추러 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머무르는 동안 불편이 없도록 편의를 체공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냉정한 실리와 타산이 앞서야 한다.
간도 쓸개도 없는 무골 호인 적 과잉친절은 오히려 경멸과 천대로 갚음을 방을 소지가 많다. 친절하되 그 바탕에는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적 자긍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존심과 자긍은 마음만 먹는다고 갖춰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외적인 국가의 이미지가 쿠데타· 독재· 군사문화· 빈부격차·고문·정치범 따위 음산한 낱말로 상징되는 형편에서는 그 국민이 자존심과 자긍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다. 민주·자유·복지·개방 등 밝고 활기찬 단어로 국가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져 있는 나라의 국민만이 대외적으로도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편집국장 대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