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예술과 홍보 구별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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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은 기자는 눈을 의심했다.

로비에 전시된 백남준의 작품 '서울랩소디'에서 청계천 복원 과정을 설명하는 40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공사 현장을 둘러보거나 2005년 10월 복원식서 청계천 물에 손을 담그고 웃는 모습 등을 감안할 때 다큐멘터리는 청계천 복원 직후 제작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작 시기는 2002년. 원래의 상영물인 '체이스5'를 빼내고 바꿔치기한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영상물도 작품의 일부분인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6억1400만원의 세금을 들여 구입한 거장 백남준의 작품에 시정 홍보물을 끼워 넣은 것은 작품 훼손이다. 백남준 작품의 국내 제작을 담당해 온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도 "무명 작가의 작품이라도 그렇게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종현 미술관장은 "나도 작가다. 소장가가 자기 집에 내 작품을 어떻게 걸든 내가 뭐라 할 수는 없다"고 당당하게 나왔다.

시립미술관은 미술관장의 집이 아니며, 시민의 세금으로 작품을 구입.소장하고 전시하는 곳이 아닌가. 그나마 미술관은 백남준의 원래 DVD인 '체이스5'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못하고 있다.

보도(본지 22일자 2면)가 나간 뒤에도 미술관 측의 강변은 계속됐다. 고건 시장 때도 서울시정 홍보물을 상영한 적이 있다며 해명자료를 내기까지 했다. 2002년 5월 2주 동안 당시 서울시장.시립미술관 직원 등 관계자들의 축사를 편집해 상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상영물은 시립미술관이 옛 대법원 건물로 이전해 개관한 것을 기념해 백남준이 만든 '작품'이라는 얘기는 빼놓았다.

시립미술관 측이 서울시 산하기관으로서 굳이 이명박 시장을 띄우고 싶었다면 별도의 TV를 마련해 홍보물을 상영했어야 했다.

미술관 측은 예술과 홍보를 혼동한 이 같은 처사가 문화시장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애써 온 이 시장에게 득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하지 않던가.

권근영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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