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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 못하는 '황우석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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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황우석 사태 초기만 해도 많은 사람은 중립지대에 있었다. 누구 말이 맞는지 일단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논문 조작이 드러나면서 사기극이 우세해졌다. 언론 플레이와 정치권 줄 대기에 능한 황 박사가 세상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는 시각이다. 이후 검찰 주변에서 "적어도 황 박사는 줄기세포가 바뀐 사실을 몰랐다"는 소식이 흘러나오면서 음모론이 떠올랐다. 제럴드 섀튼 박사와 국내 의사들이 황 박사를 끌어내리고 특허권을 뺏고자 덫을 놓았다는 주장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기 대 음모'의 갈등은 더 격해지는 양상이다. 그동안 황 박사와 노성일씨가 몇 차례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정부.서울대가 나서 강도 높게 진상 조사를 했다. 검찰 수사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사회는 무려 다섯 달이 지나도록 일차적인 논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황 박사 지지자들은 연일 시위를 벌이며 덫에 걸린 황 박사를 구해내자고 외친다. 섀튼 박사의 음모를 제기한 KBS '추적 60분'이 불방되는 사태도 있었다.

문제는 중립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냉소주의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생산적 논의를 이끌어야 할 지식인들이 논의의 장(場)에서 퇴장하고 있다. 아예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다. 서울대 생명과학계열 한 교수의 말이다. "황 박사 사건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화두로 꺼내기도 싫다. 논문이 조작됐으니 그뿐 아닌가."

소모적 대립은 핵심적인 사안이 아직 공식적으로 가려지지 않은 데서 상당 부분 비롯됐다. 줄기세포가 바뀐 사실을 황 박사가 언제 알았는지, 줄기세포를 바꿔치기한 인물은 누구인지, 섀튼은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다른 의료인들의 부적절한 행위는 없었는지…. 검찰은 조속히 답을 내놓아야 한다. 엘리트 검사 7명을 포함해 50여 명의 수사팀이 석 달 넘게 매달렸으니 조사할 건 거의 다 했을 것이다. 수사 결과가 발표되면 대립각이 잠시 더 예리해질지 모른다. 수사를 통해 모든 의혹이 풀릴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분명히 소모적 논란은 줄어들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태를 이해하게 되면서 중립지대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이를 계기로 과학기술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이 냉소주의를 털고 나와 일차적인 논란에 마침표를 찍고 과학기술의 새로운 토대를 만드는 데 주력하면 된다. 그게 사태 해결의 바람직한 수순이라고 본다.

최근 만난 황 박사의 측근은 "사건이 마무리되면 황 박사가 외국에 갈 가능성이 크다"고 귀띔했다. 해외에서 당분간 조용히 연구만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가 떠난다고 해서 모든 게 정리되는 건 아니다. 소모적인 논란을 빨리 매듭짓고 이참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부실을 보수해야 한다. 사회와 과학, 정치와 과학, 언론과 과학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생명과학 연구를 어떻게 하면 건실한 궤도에 올려놓을지 대안도 마련해야 한다. 과학사(科學史)를 보면 하기에 따라 오류와 우연도 발전의 기회가 되지 않던가.

이규연 탐사기획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