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러시아 ‘신성동맹’ 약해 내년 말 유가 치솟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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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호 14면

로버트 맥널리

로버트 맥널리

국제원유 값이 가파르게 치솟다가 지난주 고개를 떨궜다. 8일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아시아 지역 거래에서 배럴당 65.62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최근 두 달 새 가장 낮은 가격이다. 8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란 예상을 무색게 하는 반전이다. 미 원유 재고량 증가 등이 유가 하락 원인으로 꼽혔다. 하지만 최근 유가의 반전은 재고량, 생산차질 등 단기적인 요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월가에서 제기됐다. 중앙SUNDAY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 에너지분석회사인 래피디언의 대표인 로버트 맥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에서 미국 에너지정책을 지휘했다.

전 백악관 경제고문 맥널리의 경고 #“사우디·러시아가 원유 가격 통제” #트럼프 압박에 치솟던 유가 하락 #OPEC 여유생산능력 크게 떨어져 #하루 200만 배럴로 예전의 절반 #사우디, 다시 원유시장 관리자 역할 #소비 늘면 유가 급등 막기 어려워

셰일원유, 가격 안정 지렛대 구실 못 해

가파르게 치솟던 유가가 갑자기 반락했다.
“흥미로운 반전으로 비칠 수 있다. 지난달 말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대표가 상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 ‘6월22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증산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오름세가 꺾였다. 그런데 이들의 발언 배후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있다.”
트럼프가 두 나라를 압박했나.
“트럼프가 트위트를 통해 ‘사우디-러시아가 원유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는 이란과 핵 협상을 파기했는데, 이게 기름 값을 껑충 뛰게 할까 봐 사우디 등을 압박했다. 요즘 미국이 원유를 수출하고 있다. 트럼프가 이를 확대하면 사우디 등엔 타격이다.”
산유국 압박보다 셰일원유를 더 많이 공급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셰일원유가 국제유가를 안정시키는 지렛대라는 말은 과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셰일원유 증산이 짧은 기간 안에 가능한 것으로 말한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채굴 장비를 가동해 몇 주 안에 셰일원유 생산을 늘려 유가 상승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증산 가능한 양도 많지 않다. 셰일원유가 국제원유시장 지렛대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우디 영향력이 여전히 크다는 얘긴가.
“일단 사우디가 2017년 1월 러시아와 빈에서 감산에 합의했다. ‘빈 레짐(Wien Regime)’이 시작됐다. 달리 말하면 ‘사우디-러시아 신성동맹’이다. 두 나라 감산 합의를 계기로 사우디가 2008년 전후 포기한 ‘국제 원유시장 관리자(swing producer)’역할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우디─러시아가 감산합의를 올해 말까지 연장했다.”

유가 급등 뒤 3~4년 조정 후 재상승 패턴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사우디는 미국발 금융위기 탓에 유가가 가파르게 떨어지던 2008년 감산에 반대했다. 명목은 미국 셰일원유에 대한 압박이었다. 사우디는 “우리가 감산해 유가 하락이 멈추면 미 셰일원유 채굴회사들만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셰일원유 생산원가가 사우디 등보다 한참 높아, 유가가 40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상당수 셰일회사들은 생산을 포기해야 했다. 사우디의 감산 반대 때문에 국제유가는 2015년 배럴당 26달러 선까지 하락했다.

빈 레짐이 석유수출국기구(OPEC) 전성기만큼 힘이 셀까.
“요즘 빈 레짐 덕분에 국제유가 변덕이 진정되고 배럴당 60~70달러 선에서 안정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는 원유 생산국이나 소비국의 오랜 꿈이다. 그러나 국제 원유시장을 관리하기 위한 조건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 신속한 증산 능력과 유가 관리에 대한 국가 차원의 동의 등을 갖춰야 한다. 19세기 말 존 D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은 민간 회사 차원에서 원유 가격을 관리했다. 당시 미 정부의 승인이나 동의가 없어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20세기 초 텍사스철도위원회 레짐은 위원회 자체가 주정부 기관이어서 영향력이 오래 이어졌다(그래픽 참조). OPEC은 말 그대로 석유수출국 정부 대표들이 모여 의사결정하는 곳이다. 1973년 석유 금수 조치를 내려 위력을 과시했다.”
빈 동맹은 국가간 합의이니 오래 가지 않을까.
“사우디가 대표하는 OPEC과 러시아가 참여한 거대한 국제적 카르텔이다. 사우디-러시아는 10~20년 정도 동맹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두 나라 신성 동맹이 개별 회사 차원이 아니다. 국가간 합의이니 한 가지 조건은 갖춘 셈이다. 2017년 감산 합의를 통해 유가 추락 시기에 원유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안정시키는 능력은 보여줬다.”

걸프지역 지정학적 변수로 유가 널뛰기

그 정도면 빈 레짐이 힘을 보여준 것 아닌가.
“문제는 신속한 증산 능력이다. 이는 국제원유 시장에서 감산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 감산은 그저 생산량을 줄이면 된다. 반면, 증산은 개발된 유전을 재가동하는 일이다. 채굴 준비가 돼 있는 유전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이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바로 OPEC의 여유생산능력(spare production capacity)이다. 짧은 기간 안에 추가 생산이 가능한 규모다. OPEC의 장기 평균치는 하루 500만 배럴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은 200만 배럴 안팎이다(그래프 참조).”
여유생산능력이 장기 평균치보다 많이 낮다.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순간 OPEC의 조절 능력이 약하다는 뜻이다. 사우디-러시아 증산 논의 소식에 유가가 떨어지고 있지만, 베네수엘라의 내부 갈등이나 걸프 지역의 지정학적인 불안 때문에 유가가 치솟으면 두 나라가 앞장서 가격을 진정시키기 쉽지 않아 보인다. 빈 레짐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내가 사우디-러시아 동맹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국제유가 변덕은 이어진다는 얘긴가.
“유가 안정은 한국같은 원유 수입국가들이 간절히 원하는 일이다. 유가가 안정적이면 경제정책을 세우기 한결 수월하다. 하지만 세계 원유산업 구조 때문에 안정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유가는 가파른 상승 뒤 3~4년 조정기를 거쳐 다시 오르고 다시 추락하는 패턴이었다. 최근 하락기는 2014년부터 시작됐다. 요즘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가파른 상승 시작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글로벌 경기침체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2019년 말께 진짜 유가 급등이 일어날 듯하다. 그때 사우디-러시아의 관리 능력이 드러날 것이다. 생산량을 늘려 유가 급등을 조절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 맥널리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국제정치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지 W 부시 집권시기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의 에너지정책 특별보좌관이었고, 국가안보회의(NSC)에선 국제에너지 정책실장을 지냈다. 2016년엔 『원유 변동성: 유가 급등락의 역사와 미래』를 펴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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