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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볶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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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감자볶음만 보면 생각나는 게 있다. 어릴 적 시력이 멀쩡한데도 안경 쓰는 걸 고대했듯, 15 년여 전 대학 기숙사에서 지낼 땐 하숙생이 되고 싶어 몸부림쳤었다. 결국 하숙생이 됐을 땐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공중전화를 찾아 골목길을 헤매는 것도, 층마다 공동으로 쓰는 수신전용 전화가 울릴 때마다 방에서 뛰쳐나가는 것도 힘들었고, 아무 때고 방에 나타나 꾸지람하는 주인 아저씨도 귀찮았다. 특히 힘겨웠던 건 나처럼 늦잠꾸러기에겐 밥과 반찬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느지막이 일어나 식탁에 앉았을 때다. 식탁 위에 놓인 반찬 중 기름진 음식이라곤 감자볶음 한 숟갈 정도밖에 없는 것이었다. 날름 먹어치운 뒤 "아줌마, 감자볶음 좀 더 주세요" 했더니, "그러게 늦게 일어나래? 벌써 다 먹었지!"라고 놀려 대셨다. 속으로는, '아니 같은 돈 내고 하숙하는데 늦게 일어난다고 반찬이 없는 건 너무한 거 아녜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 시절 규칙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더 일찍 일어나는 수밖에. 하지만 다음날도, 다음날도 늦잠은 여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는 더 이상 늦잠을 잘 수 없게 됐다.

그날은 아침 일찍 아줌마가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감자볶음이 동나기 전에 날 깨우려는 걸까 하고 비몽사몽 간에 생각하는데, 문득 며칠 전 치른 그달치 하숙비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나와 룸메이트는 아, 돈을 너무 일찍 줬나? 하고 잠시 중얼거리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날은 늦잠 자느라 아예 밥시간을 통째로 놓쳐 버린 여느 날이었다. 아침에 놓친 감자볶음을 저녁땐 꼭 챙겨 먹을 요량으로 일찍 돌아왔는데, 그날따라 웬일인지 입구 가득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주인의 막내아들이 집이 잠겨 몇 시간째 못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숙집의 운영은 거의 아줌마가 다 했고, 아저씨는 특별한 일거리 없이 빈둥거리며 살고 있었기에, 전화도 받지 않고 문도 잠겨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경찰이 결국 유리를 깨고 문을 열었다. 따라 들어선 난 깜짝 놀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피가 흥건한 거실 한가운데에 아줌마가 벽에 기대앉아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손목이 난자된 채 문고리 너머로 목을 매고 있었다. 열린 문 틈으로 가슴이 난자된 아저씨가 침대 위에 뻗어 있었다. 밤마다 울려오던 맨 아래층의 부부싸움은 하숙생들에겐 일상적인 소음이었다. 의처증 때문에 걸핏하면 아줌마와 애들을 때리고, 때론 다 죽이겠다고 칼을 휘두르며 협박하곤 했다고 했다. 난 20살이 넘어서 첨으로 시체를 보았지만, 그 아이는 열 살에 첨으로 시체를 보았을 것이다. 그날 밤 하숙집은 유난히도 춥고 조용했었다. 잠을 설치다 아침 일찍 깨보니, 어이없게도, 4층짜리 하숙집에 나와 룸메이트 둘만 자고 있었다. 결국 그날 이후로 아무리 일찍 깨도, 더 이상 감자볶음을 먹을 수 없게 됐다. 아줌마는 그것이 미안해서 미리 내게 하숙비를 건넨 것일까?

아줌마가 남긴 유서엔 세 아이의 행복을 위해 남편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고 써 놓았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더 행복해졌을까? 그렇게 아빠를 데리고 떠나버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을까? 난 그날 신문 구석에 조그맣게 난 하숙집 살인사건 기사를 오려 일기장에 붙였다. 세상에서 너무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행복과 불행 사이의 거대한 전쟁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밑에 한 줄의 일기를 덧붙였다. 안녕, 아줌마. 행복해야 돼. 아줌마의 감자볶음은 참 맛있었어. 조금 늦었지만….

민규동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