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25. 첫사랑 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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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난해 예술인 송년바둑대회장을 찾은 필자(左)와 화가 김정헌씨. [안성식 기자]

"그(배추 방동규)의 삶에는 비분강개가 있고, 찬란한 추억이 있고, 씁쓸한 자성과 통쾌한 액션이 있다. 무엇보다 장면 전환이 빠르다. 아쉽다면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가 없다는 점일까?"

프리랜서 작가 김서령은 나를 그렇게 평했다. 1년 전 신동아 인터뷰 기사인데, 그건 절반만 맞다. 왜 멜로가 없겠는가. 보통 첫사랑이란 콩깍지가 씌워지는 경험인데, 내 경우 달콤한 애정보다는 엉뚱한 돈키호테식 모험으로 치달았다.

그 사랑을 위해 38선을 넘으려고 발버둥까지 쳤으니까. 문제의 그 여자는 나보다 한 살 연상. 강원도 원산 바로 위인 송악이 고향인 그를 고3 시절인 1953년 초에 만났다. 그녀는 서울 돈암동 우리집 앞에서 의자매 언니와 둘이서 자취하고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똑순이 스타일의 여자다. 그녀의 언니는 군 장성과 사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로운 그녀의 집안 사정을 알고 나서 영웅심이 발동했다. 북한 침투 특수부대인 KLO(켈로부대) 입대를 결심했다. KLO에 들어가는 것은 정식 입대로 쳐주지도 않고, 특수공작 때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대수롭지 않았다. 갓 스무살 혈기가 아니던가. 당시 소강상태의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낙하산으로 침투, 그녀의 가족을 모셔온다는 나름의 구출작전까지 세웠다.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라는 사정은 그때 마음에 담을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지도를 그려가며 주변의 지형지물을 설명해줬다.

지형지물을 익힌 뒤 켈로부대에 덜컥 입대 원서를 냈다. 그건 식은 죽 먹기였다. 바로 얼마 전 권총을 찬 켈로부대 소대장과 창경원에서 맞장 뜬 일로 '주먹 배추'는 이미 유명인물이었다. 켈로부대는 서울 주변에 '아베니''뽀빠이''소나기'등의 이름으로 열 곳 안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들도 나를 기꺼이 환영해줬다. 준비가 끝나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여자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객기 앞에 걸리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소집 통지를 기다리던 참에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켈로부대의 공식 해산 뉴스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해 7월 휴전협정 조인의 여파였다.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내 첫사랑은 그렇게 황당하게 끝났다.

당시 나는 진지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녀에게 나의 거창한 구출계획을 말하거나, 그걸로 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단편소설 감으로 어떨까 싶을 뿐이다. 마음 둘 곳 없었던 젊은 날의 초상에 등장하는 그녀의 이름과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채씨 성을 가진 그녀는 한때 인천에 살았고, 결혼한 뒤 강원도 철원으로 간 사실도 알고는 있다. 10대 시절 황당한 연애담을 이런저런 이유로 자세히 말 못해 유감일 뿐이다. 집문서를 갖다바친 풋사랑, 목숨을 걸었던 첫사랑….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정말 웃기는 위인이다.

배추 방동규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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