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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맺힌 화맥 일가 3대 전시회라도 열었으면…|청전 손녀 여류화가 이인하씨의 사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겸재 정선이래 우리나라 동양화가로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뤘던 고 청전 이상범 화백에게 이데올로기로 사별한 아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청전의 맏아들 건영은 부친에 버금가는 우수한 필력의 동양화가였으나 6·25의 와중에 월북, 역시 동양화가로 성장한 한점 혈육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덧없는 세월을 따라 이제는 어언 40대 고개를 넘어선 여류화가 이인하씨(43).
그가 이데올로기 싸움과 분단현실로 상처 입은 화맥 3대의 한을 딛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자신의 작품을 한자리에 묶는「1가 3대의 전시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당국의 협조를 요청하고 나서 화제다.
『아버님은 틀림없이 북에 살아 계실 거예요. 가족대신 이데올로기를 찾아 떠난 야속한 아버지지만 핏줄을 향한 그리움만은 무엇으로도 어쩔 수 없는 진한 것인가 봐요.』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이후로 밤마다 아버지 꿈만 꾸고 산다는 그는『아버지를 몸으로 얼싸안을 현실이 못된다면 같은 길을 걷는 아버지와 자식이 작품으로나마 만날 수는 없을까 해서 이런 제안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워낙 어릴 때 헤어졌기 때문에 아버지 건영에 대한 그의 기억은 그리 소상한 편이 못된다.
작달막한 키에 큰소리로 잘 웃고 어린 딸을 어르며 몹시 장난기가 심했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늘 집을 비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천막지로 만든 화구바랑을 메고 어머니의 눈흘김을 등뒤로 받으며 떠나간 후로 그는 내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1922년 청전의 맏아들로 태어난 이건영은 경신학교 2년을 중퇴하고 홀로 화업에 입문, 39년 제18회 선전의 동양화부에『산촌한일』이란 그림으로 최연소 입선하는 기록을 세웠다. 18세 때였다.
이듬해에는 북한산성의 실경을 소재로 그린『고성일우』2점이 다시 입선함으로써 아버지 청전의 맥을 이을 재목감으로 떠올랐다.
해방 후에는「조선미술건설본부」「조선조형 예술동맹」「조선미술동맹」등 좌익세가 주도하는 미술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전재동포 구제를 위해 자유신문이 주최했던「두방전」, 인천시립예술관의「개관 기념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작품활동도 폈다.
그는 49년1월 첫 개인전을 가진 것으로 돼있는데 공식적인 기록이 전하는 그의 행적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평론가 이귀열씨는『건영은 그 무렵 모종의 좌익사건에 연루, 투옥돼 있다가 6·25발발과 함께 북한세력에 의해 물러났다』고 쓴 일이 있으나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건영의 작품은 청전과 마찬가지로 전통 동양화가 추구하는 관념의 세계를 철저히 배제하고 실경을 위주로 매우 토속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청전류의 운염법을 즐겨 쓰면서도 아버지와는 화풍이 크게 달랐다.』
한때 인천전문여고에 그의 취직을 주선한 적이 있는 평론가 이경성씨의 회고다. 선전도록이 전하는 그림 외에 딸 인하씨는 13세 때 지인을 통해 손에 넣은 아버지의 그림 1점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금강산」전경을 그린 10폭 병풍 중 가능한대로 두쪽 분만을 보수하여 표구한 이 그림은 금강산의 현란한 자연경관을 섬세하고도 힘찬 필치로 재현해낸 대작이다.
명가 화맥 3대의 끝을 잇고있는 이인하씨는 홍익대미대 동양화과를 나와 개인전만 이미 세 차례나 가진 중견작가.
채색화를 주로 그리는 그는『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이며 이지적인 예술적 촉감으로 일상적 소재를 어린 날의 추억과 결부시켜 회화적으로 변신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철저한 작가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11년에 걸친 결혼생활까지 지난 78년 포기할 만큼 자신의 예술을 제약하는 모든 것과 대결하고 있다.
지금은 경기도 금곡의 한적한 연립주택에서 조각공부를 하는 대학생 딸을 데리고 살고 있다.
아버지의 월북, 어머니의 재가, 남편과의 이혼 등으로 이어지는 드문 유전의 삶을 살아온 그는 그러나『이번에 제의한 일가 3대의 전시회는 한 여인의 감상적인 한 풀이 차원이 아니라 독자의 세계를 갖는 당당한 작가들로서의 만남을 바랐기에 발상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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