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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굴기’가 삼성 잡는 건 시간문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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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국 경제는 반도체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장 산업이 없는 취약한 구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해 수출한 반도체는 약 1000억 달러로 우리 전체 수출액의 17.4%를 차지한다. 반도체 산업이 삐끗하면 우리 경제가 훅 갈 수도 있다. 한데 최근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예사롭지 않다. 중국 특유의 무기한·무제한 자원 투입 전략으로 우리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중국에 추월당하는 게 시간문제란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세계 최대 반도체 수입국 중국 #2025년 자급률 70% 목표 설정 #민관이 뭉쳐 무제한 자원 투입해 #‘반도체 중국몽’ 이룬다는 꿈 꿔 #중국과 기술 격차 있다고 하지만 #사생결단 중국 도전 막을지 걱정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말 집권 이래 처음으로 후베이성 우한에 위치한 반도체 기업 우한신신(武漢新芯)을 찾아 “핵심 기술의 자체 확보”를 역설했다. 얼마 후 중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 진흥을 위한 3000억 위안 규모의 펀드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2015년 16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육성 펀드에 이은 또 하나의 야심 찬 투자다.

중국이 ‘반도체 중국몽’을 외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중국은 세계에서 반도체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다. 세계 수요의 60% 가까이 소화한다. 지난해 반도체 수입에만 2601억 달러를 지출했다. 반면 자급률은 14% 수준 정도다. 중국은 2025년까지 이를 70%까지 끌어올리려 한다.

또 중진국 함정을 피하기 위해선 고부가 산업의 성장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도 중국이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키는 건 경제 발전의 당연한 수순이다. 중국은 현재 글로벌 IT 제품의 조립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으나, 앞으론 기술까지 확보해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쥐려 한다.

최근엔 미국과의 무역 전쟁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면서 휴대전화와 컴퓨터 등 전자제품의 필수 부품인 반도체 조달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얼마 전 미국 정부가 향후 7년 동안 중국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ZTE에 반도체 부품을 공급하지 말라고 명령한 게 그런 예다.

차이나 인사이트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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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선 국내외적 환경이 시 주석의 말처럼 반도체 핵심 기술의 자체 확보에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중국이 우리 반도체 수출 시장의 큰손이었는데 중국 스스로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올리게 되면 우리 수입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건 자명한 이치인 까닭이다.

반도체의 ‘나 홀로 호황’ 덕분에 그나마 먹고살던 우리 경제가 자칫 손가락만 빨 상황이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건 중국의 반도체 육성 정책이다. 중국 정부는 성공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번 반도체 굴기를 위해서도 과거 성공 사례인 무기한·무제한 자원 투입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자, 이제 중국의 첨단산업 육성 방식을 살펴보자. 1970년대 말 개혁·개방 정책 채택 이후 중국은 임가공 부문에서 합작을 통해 해외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노동집약적 산업을 키웠다. 경제가 기지개를 켜자 80년대 후반 중국은 한 단계 도약을 위해 고부가 기술집약적 산업의 육성을 추진하게 되고 그 주요 업종은 자동차였다.

중국 정부는 이번에도 노동집약적 산업처럼 합작을 택했다. 문제는 노동집약적 제품은 생산하면 수출할 수 있었지만, 자동차는 기술 격차로 수출이 안 돼 중국 안에서 소화해야 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시장을 내주는 대신 기술을 얻는 ‘시장환기술(市場換技術)’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기대만큼 자동차 관련 기술이 중국 기업에 이전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장환기술’ 정책과 함께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자주창신(自主創新)’ 정책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외자 기업과 합작한 ‘시징환기술’은 실패했지만 통신 장비와 고속철의 사례에서 보이듯 ‘자주창신’은 성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기술을 확보해 성장한 산업은 ‘시장 진입→기반 구축→매출 확대’의 세 단계를 거쳐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중국 정부가 금융기관 및 증시 자금조달을 통해 무제한의 자금 지원, 외자 기업 압박을 통한 기술 확보, 보조금 지급, 내수시장 우대 등 중국 기업에 엄청난 시혜를 베푼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 사례로 징둥팡(京東方, BOE)의 LCD(액정 표시 장치)를 들 수 있다. 중국 베이징 산하 국유기업인 BOE는 2002년 한국 하이디스를 인수·합병(M&A)해 시장 진입을 위한 기술을 확보하는 자주창신 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나 기술 확보에도 불구하고 공정기술이 취약해 2002~12년의 10년 기반구축 기간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당시 중국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MS)은 10% 미만으로 한국의 45%에 크게 못 미쳤다. 그러나 BOE는 대규모 적자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으로 설비와 기술투자를 확대했다. 여기에 중앙 및 지방정부의 막대한 지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러자 2012년 이후 흑자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2014년 한국 46.1%, 중국 11.9%였던 MS 격차는 2017년 한국 32.5%, 중국 28.5%로 급격하게 축소됐다. 개별 기업으로 보면 출하량 기준에서 BOE는 21.7%로 세계 1위다. LG 디스플레이의 19.3%를 추월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시장진입 단계를 지나 기반구축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LCD 사례에서 봤듯이 생산의 안정화를 위한 공정기술을 독자적으로 습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고, 또 미국의 견제가 있어 당분간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무기한·무제한의 자원 투입이 이뤄질 예정이어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시간문제일 뿐이란 이야기를 낳는다.

중국은 M&A를 통해 기술을 사올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과 일본, 대만 인력을 스카우트해 한국을 추격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대만 반도체 인력의 중국 이주는 현재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 어느 시점에 공정기술이 안정화되면 저가로 중국 내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하고 동시에 독점과 담합, 관세 및 지적재산권 등을 구실로 한국 업체를 견제할 가능성도 있다.

향후 미·중 관계 또는 양안(兩岸, 중국과 대만) 관계가 호전되거나, 미국이나 대만의 메모리 업체가 재무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M&A를 통해 조기에 기술이 중국으로 이전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중국에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민관(民官)이 하나가 돼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추격하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섬뜩하기만 하다. 한국엔 ‘반도체 이후’의 산업 전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엄정명

연세대와 시카고대 MBA에서 공부했다. 삼성생명 베이징주재 사무소 소장을 거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중국에서의 금융 등 오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경제를 연구하고 있다.

엄정명 중국경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