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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조도 쓰던 말 ‘백성의 나라’ … 실학은 ‘양반 편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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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호 27면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⑥ ‘민국’ 외면했는데 근대적인가 

‘민국’이란 말은 영·정조 때 이미 널리 쓰였다. 대한제국 시기 신문·잡지를 통해 일상화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승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광화문 촛불 집회. [중앙포토]

‘민국’이란 말은 영·정조 때 이미 널리 쓰였다. 대한제국 시기 신문·잡지를 통해 일상화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승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광화문 촛불 집회. [중앙포토]

대한민국의 ‘민국(民國)’이란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대개 20세기 들어 서양의 민주주의가 전해지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1911년 탄생한 ‘중화민국’에서 빌려왔다고 강변하는 이들도 있다. ‘민국’이 18세기 조선의 영조·정조 시대에 이미 널리 사용된 용어였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1996년 무렵 이러한 사실을 처음 발견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 유교정치 사상의 핵심으로 민본(民本)만 알던 상황이었는데, 영조와 정조가 민국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이태진,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18세기에 ‘민국’ 용어 널리 사용 #영조 31건 정조 43건 실록에 등장 #예방 혁명 차원 백성 걱정했지만 #정약용은 되레 사대부 권세 걱정 #19세기말 동학·독립협회도 사용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때 계승

어쩌다 한번 ‘민국’을 쓴 것이 아니었다. 영조 즉위년(1724)부터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대 31건, 정조대 43건, 순조대 59건 등이 발견된다. 영조대를 경계로 일종의 시대정신이 변화하고 있다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일반 백성의 존재가 특별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영조는 탕평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 ‘민국’에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김백철, ‘영조대 민국 논의와 변화된 왕정상’)

‘君國’에서 ‘민국’으로의 발전 경로 추적해야

조선은 왕과 사대부 중심의 나라였다. ‘백성’과 ‘나라’를 나란히 병렬 표기한 ‘민국’의 의미가 작아 보이지 않는 이유다. ‘민국’의 의미가 ‘백성과 나라’에서 ‘백성의 나라’, 즉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이 탈신분적 근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의 범위는 양인 이하 서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피지배계층 전반으로 확장된다. 우리 민족 내부에서 근대지향의 요소를 찾으려고 한다면 ‘군국(君國)’에서 ‘민국’으로의 발전 경로를 추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관심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근대지향의 온갖 긍정적 요소를 실학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

근대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우리 민족의 지상목표가 근대화였는데, 그 근대화를 뒷받침한 진정한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영조 때 쓰인 용례에는 “민국지대정(民國之大政)” “민국지대사(民國之大事)” “민국지대계(民國之大計)” 등이 포함된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표현할 때 ‘민’과 ‘국’이 하나의 묶음으로 마치 국가 자체를 대신하는 말처럼 사용되고 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민국이 병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병역이나 부역의 개혁을 논의할 땐 “대변통이 있은 후에야 민국이 보전된다”고 했다. 영조는 백성을 자신과 같은 피를 나눈 ‘동포’로서 인지하면서 “백성을 위해서 임금이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서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까지 했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수사적 표현이라고 해도 그 수준이 오늘에 비추어 보아도 상당하다.

‘민국’ 용어는 정조를 거쳐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진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민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국사(民國事)를 크게 소홀히 했으니…” “민국사는 감히 한가히 놓을 수가 없다”에서처럼 ‘민국사’라는 말도 상용했다. ‘민국’ 또는 ‘민국사’는 대개 소민(小民)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나라와 백성의 상호 의존 관계를 중시하면서 사대부 신하보다 백성을 더 앞세우는 현상을 영·정조 시대에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이태진, ‘조선시대 민본의식의 변천과 18세기 민국 이념의 대두’)

‘민국’ 용어에 조응하는 정책도 주목할 만하다. 일반 양민의 군역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균역법’ 실시, 극악한 형벌 폐지(『속대전』 간행), 백성의 소리를 왕이 직접 경청하는 신문고·격쟁 부활 등 영조의 개혁 정책은 ‘민국’ 용어 확산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 때 이뤄진 소민들의 상업자유화 정책인 ‘신해통공’, 서얼 등용, 공노비 폐지 논의 등도 마찬가지다.

18세기 실학자들은 ‘민국’이란 용어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20세기 한국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은 실학의 근대성 혹은 진보성이 타당한 평가라면, 실학자들은 당시 유행한 ‘민국’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확장했어야 후대의 높은 평가에 어울릴 법하다.

정조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백성의 나라’를 지향하는 ‘민국’의 흐름과는 오히려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수령으로서 애민(愛民)한다는 이들이 편파적으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 것을 위주로 삼아서, 귀족을 예(禮)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소민을 두둔하고 보호하는 경우 원망이 비등할 뿐만 아니라 풍속까지 퇴폐해지니 크게 불가하다. … 국가가 의지하는 바는 사족(士族)인데, 그 사족이 권세를 잃은 것이 이와 같다. 혹시 국가에 급한 일이 생겨 소민들이 무리지어 난을 일으킨다면 누가 능히 막을 것인가.”(『목민심서』 ‘변등’)

‘소민’은 사대부의 대민(大民)이나 준양반층을 제외한 상민·노비·천민 등을 지칭한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소민이나 대민이 다 ‘백성’일 수 있다. 영·정조는 소민의 지위를 높여 대민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나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정약용의 위와 같은 발언은 ‘민국’ 표현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당시 여전히 온존했던 신분 차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의 하나는 ‘민본(民本)’이었다. 고려 말부터 급격히 논의되었던 『서경』의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가 민본 사상의 출처다. ‘민국’의 뿌리는 이 ‘민유방본’으로 연결된다. ‘민유방본’을 줄인 ‘민방’의 또 다른 압축 표현이 ‘민국’이었다. ‘방’과 ‘국’은 같은 뜻이다. ‘민유방본’ 혹은 ‘민위국본(民爲國本)’ 같은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658회, 『승정원일기』에 446회 등장한다. 이 중 세종 때 21회, 중종 때 29회, 명종 17회, 선조 14회 사용되던 ‘민유방본’의 빈도수는 숙종 37회에 이어 영조 때 무려 124회로 급증한다. 정조 34회, 순조 118회, 고종 98회였다. ‘민국’이란 말이 영조 때부터 급증하는 것과 일치한다.

‘민국’ 용어와 소민 보호는 ‘예방혁명’일수도

영·정조 시대에 ‘민유방본’ ‘민국’이 급증한 이유가 무엇일까. 군주의 백성에 대한 시혜의 감정이 이때부터 갑자기 증가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6세기 말 정여립의 대동계 사건 이후 각종 민란에 등장한 “민유방본” 사상은 그 의미가 달라졌던 것 같다. 특히 영조·정조 때 『정감록』을 내세운 변란이나 역모 사건이 발생하며 “민유방본”과 함께 이씨왕조교체설 또는 정씨왕조도래설을 유포했다. 『정감록』의 신분타파 사상과 새 왕조의 예언은 서당 보급, 인쇄술 발전, 종이 생산·서적 유통량 증가 등에 힘입어 확산됐다. 사대부 양반들이 과거시험용으로 암송하던 “민유방본”이 공맹 유학의 상식적 레토릭에 그쳤다면, 민란에서 활용된 “민유방본”은 혁명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왕조 자체를 위협하는 ‘혁명적 이상주의’가 “민유방본” 속에는 본래 내포돼 있었다. 그런 점에서 탕평 군주들의 ‘민국’ 용어 사용과 ‘소민 보호’ 정책은 아래로부터의 민압(民壓)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예방혁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순조 때 기록엔 ‘민국’의 ‘실(實)’을 거론하는 대목도 나온다. ‘민국’이라는 말이 실제 사실과 부합되는지 여부를 논의하고 있는데, 이때 ‘민국’이 ‘백성과 나라’를 뜻한다면 어색하다. ‘나라’에 ‘실’이 없다는 말은 가능해도, ‘백성’이 ‘실’이 없다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백성의 나라’로 풀어야 자연스러워 보인다.

고종 시대에는 ‘민국’ 용어가 다시 급증하면서 대중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동학 집회와 독립협회의 관민공동결의문에도 사용되었고,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일간지,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대동학회월보’ 같은 잡지, 황현의 『매천야록』, 김윤식의 『음청사』, 정교의 『대한계년사』 등 각종 서책에 두루 쓰이며 일상화되었다. 그 의미도 ‘백성과 나라’를 넘어 ‘백성의 나라’로 확장되었다. 독립협회기관지 ‘대조선독립협회회보’(1896)는 서울주재 각국 외교관을 소개하며 “불란서 민국”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다른 나라는 ‘제국’ ‘왕국’ ‘합중국’이라고 하면서, 유독 프랑스만 ‘민국’이라고 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신분·인종 차별이 폐지된 사실을 반영한 표기로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대한제국기에는 ‘대한’과 ‘민국’이 어우러져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자연발생적으로 불려지고 그렇게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할 때도 이 같은 흐름이 반영되었다. 상해임정이 “대한제국 계승”의 의지를 밝히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배경에는 18세기 이래 면면히 이어온 ‘민국’ 이념의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어온 것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자문 전문가=한영우·오금성·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장득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참고자료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청계, 2018.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역사학회 편, 『정조와 18세기』, 푸른역사, 2013.
이태진·김백철 엮음,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상·하권, 태학사, 2011.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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