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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이 공들이는 ‘평양 강남’ … 트럼프 월드 들어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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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북핵 포기를 조건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북 선물 보따리가 연일 몸집을 불리고 있다. 미국은 “우방인 한국 수준의 번영을 달성하도록 협력하겠다”는 메시지를 북한 김정은에게 보내고 있다. 북한판 ‘마셜플랜’ 제공과 함께 평양 트럼프 타워와 맥도널드 매장 개설까지 거론된다. 우리 정부도 북한의 철도·항만 등 인프라 재건을 위한 ‘신(新) 북방정책’ 로드맵을 곧 선보인다. 서울과 서방 투자가들은 당장 평양으로 내달릴 기세다. 한반도 화해 급류를 타고 달아오른 대북투자 붐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지난해 12월 ‘경제개발구’ 지정 #1970년대 압구정·개포와 유사 #북·미 급진전에 개발 기대감 #주민 충격 완화할 특구 역할도 #“열악한 투자환경 고려할 필요” #완전 비핵화까지 제재 변수도

평양직할시엔 북한 전체 인구(2490만명)의 10% 가량인 250만 명이 산다. 노동당원이나 군부·내각의 간부, 엘리트 계층 등이 주로 거주하는 까닭에 일반 주민들에겐 선망의 도시다. 버드나무가 많아 ‘유경(柳京)’이란 별칭을 가진 평양을 북한 당국은 ‘주체혁명의 수도’로 내세운다. 풍부한 물줄기를 가진 대동강이 동서를 가로지는 건 서울 한강의 모습과 유사하다. 서울에도 있는 꼭같은 지명 몇 곳이 눈길을 끈다. ‘종로’가 있고 ‘강남’이 있다.

평양 중심부에서 서남쪽 강변에 자리한 강남 지역은 아직 미개발지구다. 논밭과 과수원이 대부분이라 평양 시민들에게 과일·채소를 공급하는 지역 정도로 알려져 있다. 마치 1970년대 서울 압구정이나 개포 지구과 같은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이 지난해 12월 말 이 곳을 ‘경제개발구’로 지정했다. 2013년 5월 경제개발구법을 만든 이래 22번째의 구역 지정이지만, 지방이 아닌 평양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북한은 경제개발구를 ‘다른 나라의 투자를 끌어들여 경제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특구’라고 설명한다. 향후 외자유치를 통한 평양판 강남 신도시 개발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올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제기한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리조트 건설에 북한이 전력투구하는 것도 제재 이후를 대비한 포석이란 말이 나온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경제개발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작품이다.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6·28조치(2012년), 기업 자율권 부여 등을 담은 5·30조치(2014년)를 포함한 시장경제 요소 도입과 함께 김정은 집권 이후 경제정책의 한 축을 이뤘다. 지난해 말까지 경제특구 5개, 지방급 경제개발구 19개 등 모두 27개가 지정됐다. 신의주와 혜산·만포 등 중국과의 변경 지역이나 청진·나선(나진과 선봉)·흥남 같은 규모 있는 항만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많은 곳을 개발구로 지정하고, 제대로 된 개발 청사진이나 투자 유치 전략을 선보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 개발 하자는 건 한 곳도 하지 못한다는 얘기랑 같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졌던 강남경제개발구가 다시 각광을 받게된 건 북·미 관계의 진전이 급물살을 타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6월 12일 상가포르) 물밑 조율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13일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 무기 프로그램을 완전 폐기하면 미국 민간기업의 대북투자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가 세금을 퍼부을 수는 없지만 민간 회사가 들어가 전기를 공급하고 농업투자와 인프라 건설을 추진하는 건 가능할 것이란 게 폼페이오 장관의 설명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평양 대동강변에 트럼프 타워가 건립되고, 맥도널드 매장이 문을 열 것이란 관측까지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두했다. 미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한 체제의 개혁·개방 지표로까지 받아들여지는 햄버거 매장이 평양에 상륙하는 상황이 현실화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회계·컨설팅 전문기관인 삼정KPMG 대북비지니스지원센터 조진희 수석연구원은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트럼프 타워의 건립과 미국 식음료 브랜드의 평양 매장이 진출하게 된다면 대동강변 강남경제개발구에 조성될 뉴타운에 입지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망했다. 평양 중심구역의 대동강변 등에는 이미 김정은 지시에 따라 53층 주상복합 건물과 46층 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선 상태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강남경제개발구를 지정한 걸 두고 미국과의 유화모드 선회를 결심하면서 대북투자 유치를 겨냥했기 때문이란 진단도 나온다. 평양 주민들이 받게 될 충격을 완화하고 미국 기업이나 인력의 대북진출 초기 적정수준의 통제를 위해서도 평양 중심가보다는 특구 성격의 강남개발구에 유치하려 할 것이란 해석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미 협의 과정에서 미국 측이 ‘평양에 성조기를 단 캐딜락 차량과 미국인이 줄지어 다녀도 문제 없겠냐’라고 북측에 타진했다는 건 그만큼 북한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대규모 주택 건설은 체제 선전용이나 당국 주도에서 벗어나 최근에는 개인자본이 투입된 아파트 건설과 쇼핑센터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게 삼정KPMG 측의 분석이다. 서구식의 아파트 분양 모습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주택 임대업이 출현하고 소(小) 토지와 시장 매대를 사고파는 현상도 점차 번지고 있다고 한다. 삼정KPMG 측은 최근 펴낸 『북한 비지니스 진출전략』에서 “건설붐이 일고 있는 평양은 뉴욕 맨해튼과의 합성어인 ‘평해튼(Pyonghattan)’이 낯설지 않은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건설투자 비중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약 14% 수준이다. 2020년엔 11%, 2030년엔 9% 정도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건설업계 쪽에서 북한 인프라 건설 참여를 통한 돌파구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남북 교류시대와 통일에 대비한 인프라 지원이 남북 상생의 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통일독일도 구 동독 지역의 노후화된 인프라와 산업시설을 재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여전히 열악한 북한의 투자 환경을 고려할 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이 판문점 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고, 북·미 간 논의에도 진전이 있는 듯한 분위기지만 실제 이행단계까지 마무리 되려면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북핵의 완전한 폐기와 반출, 미국 내 이전까지 마무리되기 전에는 국제사회가 대북제재의 수위를 일정 정도까지 유지할 공산이 크다. 개성공단 가동이나 금강산 관광 중단 사태처럼 남북관계 변수나 북한 내부의 사정에 따라 돌출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건설업체의 진출이나 대규모 투자의 경우 자재·장비의 반출이 어려워지거나, 짓고 있던 인프라를 몰수 당하는 일도 닥친다. 조진희 수석연구원은 “대북제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선 중국·러시아 등과의 협력투자를 통해 우회하고, 특구 지역을 중심으로 인프라 건설에 참여하는 전략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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