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철도파업」 |김창욱 사회부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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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6일 오전8시 서울 구로전철역. 등교길의 한 여중생은 밀치고 당기는 인파에 밀려 두차례나 전동차를 놓치고 발을 굴렀다. 30여분후 세번째 전동차가 도착, 가까스로 발을 얹는 순간 등뒤에서 목덜미를 잡는 승객의 손에 엷은 블라우스가 찢겨지고 가방은 바닥으로 굴렀다. 이 여중생은 수치심에 등교를 포기하고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같은날 밤10시.
출퇴근시민 수송을 위해 운휴시내버스가 총동원되고 택시부제가 해제되어 서울시내 전차량이 거리로 쏟아지는 바람에 평소 15분이면 족했던 영등포역∼개봉동입구간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1시간. 콩나물버스에 올랐던 일부시민들은 찌는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려 종종걸음을 치기도 했다.
철도기관사들이 하루 1백50만명에 이르는 철도이용승객의 발을 볼모로 잡고 전면파업을 단행했던 26일의 서울 풍경이었다.
「근로조건개선」은 이같이 엄청난 희생 위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그늘에서 헌신하는 철도공무원의 근무조건이 결코 만족스러운 수준이 못된다는 것을 많은 시민들은 이해할수 있다.
기관사의 시간외 근무수당은 시간당 6백20원. 졸리는 눈을 비비며 밤열차를 운행,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을 달려봐야 손에 잡히는 수당은 설렁탕 한그릇 값에 불과하다.
어디 그뿐인가. 2∼3년전만해도 운행도중 승무교대제가 실시되지 않는 바람에 장거리열차운행 기관사는 기관실에서 대소변을 처리해야 하는 낯뜨거운 불편도 겪어야 했다.
철도청은 10년경력기관사의 월평균 임금이 87만8천여원이라지만 상여금(16만7천원), 각종 수당등을 제외한 기본급은 33만5천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관사들은 국영기업체 공무원은 단체행동을 할 수 없다는 법규정에 묶여 모든 불만을 안으로 삭여왔다. 이번 파업이 한국철도 89년사상 최초의 파업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기관사들은 공권력 개입과 시민의 여론에 무릎을 꿇고 파업 하루만에 근무를 희망하고 나섰다. 결국 기관사들은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은 셈이다.
한꺼번에 그것도 불법으로 모든것을 얻으려던 무리가 문제였다. 근로조건의 개선은 시급히 이루어져야겠지만 현실여건까지 충분히 고려해 대화와 타협으로 타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슬기도 발휘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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