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도토리의 변신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80호 28면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49> 마포 어반도투리

서울 공덕역 1번 출구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도토리 요리 전문점의 이름은 ‘어반도투리’다. 도토리의 강원도 사투리 ‘도투리’에 도회적이고 모던하다는 뜻의 어반(Urban)을 더해 완성했다. 김형석(44) 대표가 아버지 김이용(81)씨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모태는 1968년 서대문구에 오픈한 한식 전문점 ‘향정’. 소갈비와 불고기가 전문으로 큰 기업 회장님이나 기관의 수장들이 자주 찾았다. 장인정신이 투철했던 창업주 김이용씨는 매일 새벽 4시면 직접 갈비를 뜨고 음식을 준비했다. 그렇게 30년을 이어갔다. 60대가 되어 몸도 마음도 지치자 좀 쉬기로 하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평생 몸으로 뛰어온 그에게 일상은 무료할 뿐. 고심 끝에 2002년 증산동에 ‘향정도토리촌’을 오픈했다. 아이템은 도토리 묵밥. 하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마냥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아들 형석씨가 장성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여러 기업에서 15년 동안 마케팅 전략과 기획 업무를 하며 CMO의 자리까지 올랐다. 부모님이 마냥 식당을 지키는 것이 안타까웠던 아들은 마케터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뛰어난 기술과 손맛을 살리며 가장 잘 할 수 있는 메뉴로 다시 짰다. 1만 2000원에 도토리를 코스로 즐길 수 있는 메뉴 ‘한상차림’이 탄생했다. 6개월 정도 지나자 가게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들은 2015년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맞닥뜨린 문제는 연로한 부모님이었다. “음식이 망가질까봐 두 분 다 주방에서 나오질 않으셨어요. 게다가 워낙 까다롭게 음식을 만들다 보니 주방 인력이 버티지 못하고 계속 그만뒀죠. 안 되겠다 싶어 주방으로 들어가 3년간 일하며 부모님의 레시피를 그대로 전수받았어요. 실력 있는 주방장과 직원들을 뽑아 인력을 키우고, 인근에 도토리 가공실을 만들어 작업 공정을 시스템화했습니다.”

‘도투리’로 상호를 바꾼 2016년에는 이미 증산동의 맛집이 됐다. 그의 꿈은 부모님의 음식을 모던하게 재해석해서 술을 함께 내는 공간을 만드는 것. 해외 맛집을 다니며 잘 되는 가게의 특장점을 분석했다. 술을 스토리에 맞춰 내며, 주류 전문성을 갖추어 한식과 주류 페어링에 강점을 가진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컨셉트를 정하고 나니 술을 제대로 페어링 할 전문가가 필요했다. 곧바로 한화호텔&리조트 근무 시절 만난 김수희(40)씨를 떠올렸다. 주도락가(酒道樂家)로 소문난 그는 2007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 와인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을 비롯해 보르도 와인 마스터 클라스 수료,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 취득, 위스키 및 막걸리 소믈리에 과정 이수 등 두루 내공을 쌓았다.

둘은 의기투합했고 3월에 이곳을 오픈했다. 칼로리도 낮고 건강한 식재료인 도토리 요리에 주류 전문가가 골라주는 술의 궁합이 궁금했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니 음식 가격은 1~2만원 선. 도토리 수급이나 손질 과정만 해도 꽤 비용이 들텐데.

“도토리는 경북 의성에서 공수해오고 있습니다. 생 도토리를 물에 불린 뒤 껍질을 까지 않고 갈아냅니다. 그래야 향이 고스란히 담기죠. 시간이 지나면 도토리녹말이 앙금처럼 가라앉아요. 도토리의 맛과 향, 영양을 그대로 살리는 게 관건인데 여기에 특허받은 저희 기술이 들어갑니다. 이 녹말을 활용해 묵·만두·국수·전 등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가올 여름엔 도토리 콩국수를 선보일 예정이고, 튀김 옷을 입힌 도토리 탕수육도 준비하고 있다.
이날 추천 받은 음식은 수제 도토리묵 무침, 이베리코 꽃목살 구이, 밀푀유 도토리 만두 전골, 그리고 김치말이 도토리 국수.

먼저 영양부추·치커리·쑥갓·오이·김과 함께 도토리 묵이 한 접시 풍성하게 담겨 나온다. 매칭된 술은 공덕동 막걸리. 배상면주가와 지역 양조장이 손잡고 생산한 수제 막걸리 브랜드 ‘동네방네 막걸리’다. 마포에서만 판매된다. 도토리묵과 막걸리의 만남은 가장 베이직한 매칭. 막걸리의 은은한 단맛이 쫀득하고 고소한 도토리, 짭조름하고 매콤한 소스와 잘 어우러진다.

다음은 이베리코 꽃목살 구이. 도토리를 먹여 키운 이베리코 돼지고기를 숯불에 초벌 한 뒤 화로에 담아낸다. 들기름의 향이 은은하게 배어있는 건나물 무침, 충주 송화버섯, 프리세, 함초 소금, 생 와사비,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취향에 맞게 곁들여 먹으면 된다. 매칭된 술은 호주 와인인 디 오퍼튜니스트 쉬라즈. 적절한 복합미와 산미를 가진 와인으로 고기의 맛을 너무 압도하지 않고 건나물의 짠맛을 부드럽게 잡아준다.

메인 요리인 밀푀유 도토리 만두 전골은 본점의 만두전골을 모던하게 풀어낸 메뉴다. 50년 전통의 비법이 담긴 양지사골육수를 쓰는데, 맛이 진하면서도 담백하고 개운하다. 알배추와 목심을 켜켜이 쌓고, 도토리 만두와 송화버섯, 만송이 버섯, 토마토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맛깔진 자태를 완성했다. 냄비 채 다 먹어도 부대낌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르 베르샹 샤도네이를 곁들였다. 깔끔한 국물 요리의 맛을 헤치지 않으면서 각 재료의 맛을 잘 살려주는 와인으로 가격도 3만원 대다.

마무리는 김치말이 도토리 국수. 양지사골육수, 동치미와 김치 국물을 배합해서 만드는데 상큼한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추천받은 청양구기주를 한입 털어 넣으니 입안에서 기분 좋은 단맛이 어우러진다.

이날 또 금주령을 해제했다. ‘도토리는 칼로리 낮은 다이어트 식품이야’라고 합리화하며. 이쯤 되면 몸속의 내장기관이 주인 욕을 엄청 할 것 같다. “도토리는 살 안 쪄요. 살은 네가 쪄요!”

이지민 

‘대동여주도(酒)’와 ‘언니의 술 냉장고 가이드’ 콘텐트 제작자이자
F&B 전문 홍보회사인 PR5번가를 운영하며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술과 음식, 사람을 좋아하는 음주문화연구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