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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퍼스펙티브

삼성 배당 사고, 전화위복의 한 수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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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삼성증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

탐욕의 손가락(Fat-Finger)이 불러온 파문은 컸다. 오래 봉인됐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삼성증권 사태는 한국 금융시장의 두 가지 해묵은 숙제를 묻고 있다. 하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증권시장은 상대적 약자인 개인투자자에게 오랫동안 불공정·불공평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도 여전히 미흡하다. 개인들은 분노와 절망을 호소했고, 희생양을 찾았다. 그게 공매도 폐지 청원으로 폭발했다. 순식간에 20만 명을 넘어선 것은 그만큼 시장에 대한 불신의 벽이 크다는 의미다.

탐욕의 손가락이 드러낸 민낯 #유령 주식 만들어 멋대로 팔아 #분노한 개인, 공매도 폐지 청원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 잡아야 #개인 일탈, 시스템 미비 보다 #반재벌 정서 편승, 삼성 더 공격 #통렬한 반성·개혁 의지 보이려면 #삼성, 증권서 아예 손 떼면 어떤가

다른 하나는 재벌 개혁이다. 타깃은 제2금융권이다. 제1 금융으로 불리는 은행은 산업자본의 진입이 사실상 원천봉쇄돼 있다. 재벌이 소유할 수 없다. 반면 보험·증권 제2 금융은 ‘재벌의 사금고’란 오명을 뒤집어 써왔다. 반재벌 정서와 맞물려 국민의 불신과 의혹, 감시와 비판이 몰렸다. 직원들의 일탈일 수 있는 사고를 놓고 삼성증권에 쏟아지는 불신과 매질이 유난히 강한 것도 그런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금융은 이 두 가지 숙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증권·금융업계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에게 물었다. 정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단서는 찾을 수 있었다.

공매도 해법은 상대적으로 명쾌하다. 조재민 KB자산운용 대표는 “제도는 문제 될 게 없다. 어렵더라도 시장의 공정·투명성을 높이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주식을 빌려 파는 공매도는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투자 기법이다. 우리는 기관·외국인 투자자와 자격 요건을 갖춘 개인투자자에만 허용한다. 선진 증시엔 대부분 공매도 제도가 있다. 한국은 공매도를 허용하는 나라 중엔 가장 규제가 강한 편이다. 거래 대금 비중(코스피 6.4%)도 미국(42.4%)·일본(39.4%)에 비해 작다. 그런데 왜 개인투자자들은 공매도에 분노하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오랫동안 공매도 폐지를 주장해 온 박창호 공매도 개선 모임대표의 주장을 압축하면 이렇다. “공매도 세력은 주가가 떨어져야 돈을 번다. 큰 손과 대주주가 걸핏하면 내부자 거래를 하고 작전 세력의 주가 조작이 판치는 우리 시장엔 안 맞는다. 공매도가 본래 취지와 달리 작전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그 작전에 휘말린 개인투자자의 피 같은 돈을 갈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폐지해야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제도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우리 시장에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렇다고 일각의 주장처럼 개인투자자에게도 공매도를 전면 허용하는 게 해법일까. 안일찬 한국거래소 주식매매팀장은 “정보와 자금이 부족한 개인들이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다. 시간이 걸려도 시장 투명성을 높이는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방법은 다 안다. 미공개 정보를 악용한 이들에겐 패가망신의 징벌적 제재를 가하는 게 시작이다. 대주주나 내부자가 포함됐다면 가중처벌하고 2차 내부 정보 이용자(주로 기관투자자)도 수익의 5배 이상을 추징하는 것이다. 작전 세력에 대한 감시와 모니터링도 더 촘촘히 해야 한다.

국민연금의 대차(주식을 빌려주는 것)도 금지하는 게 옳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5174억원 어치의 주식을 공매도 세력에게 빌려주고 수수료로 86억원을 받았다. 이게 옳은 일인가 하는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국민연금 투자는 멀리 봐야 한다. 국가 경제의 성장 동력을 키우는 쪽으로 투자해야 한다. 그게 결과적으로 국민연금에도 이득이다. 반면 공매도는 단기투자 성격이 짙다. 60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1년에 몇백억원 벌자고 단기 투자를 부추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공매도 폐지는 안 된다”고만 할 게 아니다. 꼭 필요하다며 개인들만 막는 건 정부의 보신주의일 뿐이다. 일본처럼 개인의 공매도를 대폭 허용하는 방안을 찾아봐야 한다. 더 본질적인 게 있다. 증권 시장은 탐욕과 공포를 가격으로 재는 복마전이다. 성숙한 시장만이 혼란과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펀드·연기금 투자를 활성화하고 장기 투자의 세제 혜택을 높이는 게 그런 방향이다. 워런 버핏은 증권시장을 “시간을 사는 곳”으로 불렀다. 오래 투자하면 꼭 성과를 주는 시장을 만드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주식거래세는 그대로 둔 채 양도세만 늘려 세금 더 걷기에 급급한 정부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 화두인 삼성증권 배당 사고는 더 복잡하다. 규모와 죄질이 최악이었고, 공매도 폐지 청원에 불을 붙인 것도 사실이지만 본질은 공매도 문제로 보기 어렵다. 김영욱 가천대 연구교수는 “공매도보다는 직원의 착오와 실수가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라며 “진짜 문제는 증권사 임직원이 악의를 가지면 시장을 언제든지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업계의 시각도 비슷하다. 서명석 유안타증권 사장은 “직원들의 순간적 탐욕이 부른 참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삼성증권의 특수한 문화와 정서, 상황이 직원들의 일탈을 부추겼다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원한 A증권사 B사장은 “삼성증권은 과거에 삼성그룹의 비자금·차명계좌 창구 역할을 했다. 직원들이 거액의 차명 주식 거래를 겪어봤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 계좌에 들어온 거액의 주식을 비자금이나 차명 주식으로 오인해 팔아치웠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과 삼성증권은 수습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유령 주식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시스템을 손보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삼성증권을 강하게 제재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금융 개혁이다. 주식은 시장이 사기업에 발권력이라는 공익을 부여한 것이다. 그에 대한 합당한 규제와 보상이 어김없이 따라야 한다. 그 발권력이 사익에 쓰이면 적폐다. 그런 적폐를 바로 잡는 게 금융 개혁이요, 재벌 개혁이다. 문재인 정부의 재벌 개혁의 한 축도 여기에 맞춰져 있다. 주 타깃은 삼성 금융계열사다.

조윤제 주미대사는 지난해 대선 캠프에서 문재인 정부의 경제 철학을 다듬었다. 그가 추린 집권 후 10대 경제 개혁 과제 중 하나가 ‘제2금융권 금산분리(金産分離)’다. 조 대사는 당시 “은산분리만으론 의미가 없다. 은행 대출은 대기업에 가는 게 10% 이하다. 지금 대기업은 자본 조달을 대부분 시장에서 한다. 삼성의 조달 능력이 가장 크다. 한국의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한다. (재벌에 의한) 금융 시장의 왜곡을 막아야 한다. 그게 재벌 개혁이요 금융개혁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철학은 문재인 정부의 금융 개혁 청사진에 그대로 반영됐다. 낙마한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을 청와대가 그토록 오랫동안 붙들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삼성증권도 나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국민 사과와 피해 보상에 이어 200명 삼성증권 임직원이 반성문도 썼다. 전 임직원의 자기 매매를 금지했다. 고객 이탈은 거의 없다지만 비난 여론은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더 과감하고 통 큰 반성과 결단이 필요하다. 나는 이번 기회에 삼성이 삼성증권에서 아예 손을 뗄 것을 권한다. 희생과 손실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섯 가지 이득이 있다.

첫째, 재벌 개혁의 화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요한 건 진정성이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통렬한 반성의 메시지가 나와야 한다.

둘째,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드는 씨앗이 될 수 있다. 한국 금융에는 왜 삼성전자 같은 세계 일류가 나오지 않을까. 나는 삼성이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금융은 면허 장사다. 규제·감독 당국이 방향을 정한다. 예컨대 어떤 금융회사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규제를 풀어주지 않으면 세계 초일류는 될 수 없다. 삼성이 있는 한 금융 당국은 국민 정서를 구실 삼아 어지간한 규제는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삼성이 사라져야 역설적으로 금융의 삼성전자가 나올 수 있다.

셋째, 직원의 사기를 높이고 군기를 잡을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 구속 후 이어지는 전방위 삼성 때리기로 직원들의 사기·군기가 말이 아니라고 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의 삼성이 아니다. 삼성증권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 ‘먹튀’ 수준이다. 회사에 대한 자긍심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래서는 천하의 삼성도 오래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넷째, 대법원 상고를 앞둔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재벌에 대한 국민 정서는 악화일로다. 법원 판결도 국민 정서를 무시 못 하는 추세다. 화끈하고 분명한 반성의 메시지야말로 정상 참작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재벌의 사금고 논란도 씻을 수 있다. 삼성증권은 계열사 자금을 굴리고 계열사 인수·합병이나 기업공개를 중개해 상대적으로 손쉽게 덩치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주주와 오너 일가의 이익에 앞장선 것 아니냐는 불필요한 의혹도 받고 있다. 그런 시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아예 증권업에서 손을 떼는 게 방법일 수 있다.

말로는 쉽지만 막상 실행은 어려울 것이다. 따져봐야 할 것도 많다. 손을 뗀다면 어떻게 뗄 것인가. 매각할 것인지 청산할 것인지, 팔면 어떻게 누구에게 언제까지 팔 것인지부터 쉽지 않다. 지분 정리는 물론 이사회 통과도 낙관할 수 없다. 직원이나 고객, 주요 주주와 소액주주 설득도 만만찮을 것이다. 거꾸로 무책임한 삼성이란 비난이 일 수도 있다. 삼성 관계자는 “증권은 그룹의 성장 동력이자, 성장 지원 후방 부대다. 특히 계열사의 인수·합병 등에 유용하다. 증권이 없다면 그룹의 새 성장동력인 인수·합병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현실적 어려움을 다 따져보고도 남는 게 있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지금 삼성에 필요한 건 딱 하나다. ‘삼성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그런 평가를 통해 국민 정서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반재벌, 반기업 정서가 지금처럼 커지기만 해서는 삼성뿐만이 아니다, 한국 경제에 내일은 없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