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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인 생활가구의 품격을 원한다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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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20면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친구의 방은 조도를 낮춘 은은한 불빛으로 묵직했다. 무심코 놓인 듯한 원형 테이블은 손때 묻어 반질반질해진 나뭇결조차 고왔다. 두 개만 놓인 의자는 기시감으로 친숙하다. 기억 속 완행 열차의 낡은 의자는 두터운 녹색 벨벳 천 색깔로 아름다웠다. 그 녹색을 여기서 보게 될 줄 몰랐다. 앉아보니 이상하리만큼 편했다. 의자에 몸을 맞추어 뒤척일 필요가 없다. 마치 내 몸에 맞춘 전용의자 마냥.

윤광준의 新생활명품 <78> 가리모쿠 가구

영국제 스펜더 스피커에서 도어스의 ‘디 엔드’가 흘러나오자 편안하게 두 다리를 쭉 뻗고 중얼거렸다. ‘이 방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이 분명해.’ 이유가 궁금했다. 주인장은 방의 분위기 같은 낮은 톤으로 대답해줬다. “오래전부터 쓰던 가리모쿠를 갖다 놓았을 뿐이에요.”

그의 출판사에서 최근 나온 책 『미스터 포터』에 가리모쿠(カリモク)가 등장한다. 멋진 삶을 살고 싶은 남성들의 가구 선택 편에 나온 동사의 옷걸이다. 존재감을 감춘 세련된 디자인은 옷을 걸지 않을 때 날개를 접어 벌어지지 않게 처리했다(오른쪽 사진). 자칫 지저분하게 보일지 모르는 스탠드형 옷걸이는 비례와 균형만으로 짜임새 있는 오브제가 됐다. 영국의 멋쟁이가 주목한 일본의 가구 브랜드란 역시 남다른 데가 있다.

홍대 앞과 연남동 일대에 생긴 커피숍과 카페, 식당은 어림짐작으로 1500곳을 넘겼다 한다. 하루에 한 곳씩 돌아봐도 얼추 3년이 걸릴 숫자다. 세련된 이들이 꾸민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맛이 괜찮다. 겉모습보다 내부의 가구와 집기를 더욱 신경 쓴 집이 제대로 된 거다. 화려한 장식보단 개성적 조명이, 테이블보다 의자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면 안심이다. 간결한 선과 탄탄한 재질감이 돋보이는 나무 팔걸이에 단추 박힌 검정 가죽시트 의자를 본 적 있는지. 오래 앉아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면 일본제 가리모쿠일 개연성이 높다.

간결한 선과 탄탄한 재질감

가리모쿠는 오랜 세월 가구만 만들어온 회사다. 세계 최고라 자부하는 관록의 목공 기술이 특기다. 말로만 들어선 알 수 없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 삼성동 매장 근처에서 약속이 있던 날 밤 일부러 그 앞을 지나갔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건물엔 간판도 달지 않았다. 퇴근한 직원을 대신한 조명만이 텅 빈 쇼 윈도를 밝혀주었다. 시선을 집중시킨 의자의 분위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평소 보던 가구의 비례와 다른 형태다. 의자의 프레임은 가늘어 보이지만 단단하게 느껴졌다. 목재의 재질감이 남달랐다. 뭔가 주장이 분명한 가구란 인상을 받았다.

결국 수소문해 가리모쿠 수입사 대표를 만났다. 가구에 대한 애정이 많은 이였다.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취급하는 가구의 매력이 뭡니까?” 대답은 싱거웠다. “비슷하게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디테일을 담은 가구지요.” 다양한 이력의 대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열의는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게 예의다.

말의 진위는 물건을 보면 바로 알게 된다. 진열된 가구에서는 접착제나 도료에서 풍기는 눈 따갑고 역한 화공약품 냄새가 나지 않았다. 개어놓은 에폭시 접착제가 30분을 넘기면 쓰지 않을 정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했다. 무려 여덟 번 덧칠해 두터운 도장막이 입혀져도 나무의 질감이 잘 느껴졌다. 공들여 갈아냈음직한 매끈한 표면은 물 한 방울 스며들지 않을 만큼 치밀했다. 만든 이의 전문성이 짙게 다가오는 마무리에 감탄이 나왔다.

요즘 가구에 쓰이는 나무는 대개 고주파 건조를 한다. 빠른 시간과 효율 때문이다.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자연건조 목재가 귀해진 시대다. 이 회사는 뒤틀리지 않고 색깔도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자연 건조된 나무만 쓴다. 밀도 균일한 부분을 따로 골라 짝을 맞추는 과정이 남아있다. 같은 나무라도 생육조건과 환경에 따라 두 배의 밀도 차이가 난다. 나뭇결 무늬가 일정하고 단단한 강도를 지닌 비결이 여기 있었다. 짜 맞춤한 각 부위의 접합 정도가 워낙 견고해 무거운 하중도 끄떡없이 견뎌낸다.

의자가 자주 망가져 2년 이상 써 본 적이 없다는 씨름 선수 이야기다. 다리가 가늘어 허약해 보이는 가리모쿠 의자를 반신반의하며 사게 된다. 의자는 100kg이 넘는 몸무게를 3년 이상 버티며 멀쩡하게 건재했다. 제대로 만든 의자의 진가에 놀랐음은 물론이다. 테이블에 비해 훨씬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 의자다.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 회사의 방침도 여기에 근거한다.

가죽시트의 편안함도 눈여겨볼 만하다. 좋은 가죽을 엄선해 정밀한 재단으로 완성한 시트는 고급스러움으로 정평이 났다. 시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렉서스 자동차가 가리모쿠의 자문을 받을 정도다. 표준 신장 172cm의 사람을 기준으로 시트 설계가 이루어진다. 왜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직접 앉아보면 알게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체형에 딱 맞는 편안함으로 엉덩이와 등이 감싸지는 느낌을. 서양인 체형에 맞춘 시트의 길이와 폭이 멋있어 보이긴 하나 왠지 불편했던 이유를 알겠다.

가리모쿠 가구 가운데 많이 알려진 K체어는 어디선가 본 듯하다. 맞다! 바로 바우하우스 시절 미스 반데어 로에가 만든 명작 바르셀로나 체어의 변형이로구나. 이집트 귀족의 의자에서 모티프를 따 왔다는 가죽에 단추를 교차시킨 등받이 문양과 두께가 비슷하다. 시대를 달리한 두 물건은 진정 좋은 인자를 공유한 셈이다.

바우하우스에 더해진 북유럽 감성을 일본식으로

바우하우스의 폐교로 독일에서 멈춘 기능주의 디자인은 이웃나라 덴마크로 건너갔다. 덴마크인은 너무 반듯해서 딱딱하게 여겨지는 독일식 모더니즘을 손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북구의 감성을 입혀 말랑한 형태로 만들었다. 50년대 덴마크 디자인이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된 바탕이다. 가리모쿠는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대놓고 베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후발주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독일에서 출발해 덴마크의 세련됨이 더해진 바우하우스 전통에 일본의 제조기술이 더해졌다. 가리모쿠가 완결시킨 일본판 가구는 성공적이었다. 당시의 활력에 동승한 사회적 분위기도 괜찮았다. 유럽의 감성을 자기화시키는 일로 분주했던 일본의 디자인 역량이 전성기를 맞는 시기와도 일치한다. 미국 영향에 편중돼 성장한 우리의 80년대도 비슷했다.

일본의 문화기획자들은 당시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을 주목했다. 생명력 넘치는 60년대 디자인을 복원시키려는 60VISION 프로젝트의 출발이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향수는 하나 둘 현실로 재현됐다. 가리모쿠도 여기에 참여한 핵심 회사 중 하나다. 옛 명작들을 이은 가리모쿠 60시리즈가 2002년 부활한 배경이다.

시대와 호흡하려는 새로운 시도도 눈여겨 볼만하다. 유럽 디자이너를 영입해 펼치는 뉴 스탠더드 시리즈는 오늘의 감성에 근접하고 있다. 가리모쿠는 일상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화려하지도 대단해 보이지도 않은 잔잔한 탁자와 테이블, 의자 같은 생활가구가 품목의 전부다.

사람의 삶이란 결국 의자와 테이블을 전전하며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건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튼튼한 가구다. 나무를 가구에 쓰려면 백 년이 걸린다. 당연히 가구는 백 년을 쓸 수 있게 만들어야 도리다. 그렇다면 인간은 백 년 동안 새로운 나무를 심는 사명으로 살아야 순리 아닌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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