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무역전쟁 ‘트럼플라자’ …환율조작국 지정 압박해 원화값 초강세 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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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경상수지 만년 적자국이다. 미국 상무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4662억 달러로 전년보다 적자 폭이 3.2% 늘었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2006년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가 2014년 이후 늘어나고 있다.

미, 무역적자 면하려 각국 환율 압박 #1985년 플라자 합의 땐 엔고 이끌어 #미국서 환율조작국 지정 땐 피해 커 #한·중, 눈치 보며 자국 시장 손 못 대

경상수지 적자가 쌓일 때마다 미국이 지목하는 나라가 있다. 대미 흑자 폭이 큰 중국과 일본·한국·독일 등이다. 미국은 이들 국가가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무역 불균형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미 재무부가 매년 4월과 10월 발표하는 ‘환율보고서’는 눈엣가시 같은 이들 국가의 목을 죄는 수단이다.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강력한 경제 압박을 당한다. 대상국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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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환율보고서를 지렛대 삼아 글로벌 외환시장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한국과 중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압박하며 두 나라의 통화가치를 끌어올리고 달러값을 절하하고 있다. 트럼프가 주도하는 또 하나의 무역전쟁으로 플라자 합의에 빗대 ‘트럼플라자(Trump+Plaza)’로 불린다.

충격파는 한국 외환시장으로 번지고 있다. 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달러당 5.6원 내린 1059.8원에 거래를 마쳤지만 원화값은 최근 한 달간 1.93% 오르며 강세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지난 3일 원화값은 달러당 1054.2원까지 오르며 2014년 10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여럿이다.

우선 한국 외환 당국의 손발이 묶였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이달 미국의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외환 당국이 몸을 낮추고 있다”고 말했다. 외환 정책의 투명성과 책임성에 대한 강력한 이행 의지 등을 약속한 ‘환율 합의’도 발목을 잡고 있다. 외환시장에서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에 나설 수 없게 된 이유다.

지난해 10월 환율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7월~2017년 6월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 규모는 49억 달러로 추산됐다. 한국 GDP의 0.3% 수준이다.

이승훈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환율협약이 강행되면 미세조정 여지가 줄면서 가파른 원화 강세가 재연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위안화 강세도 원화에는 좋지 않은 신호다. 위안화 가치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3.37% 올랐다. 2015년 8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임혜윤 대신증권 연구원은 “중국이 위안화 강세를 용인해 대중 무역적자 축소를 내세운 트럼프에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의 휴전을 위해 중국이 ‘위안화 절상 카드’를 꺼내면 한국의 원화 강세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원화가치가 더 오를 수도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회담 결과에 따라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면 국내 금융시장의 트리플 강세(원화 강세, 주가 상승, 채권값 상승)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 통화보다 자국의 통화가치가 상승(원화의 경우 환율 하락)하면 수입품 가격이 싸져 일반 국민의 지갑은 두둑해지는 효과가 있다. 반면 수출 기업은 어려움을 겪는다. 외화로 표시된 상품 가격이 비싸져 경쟁력이 떨어지는 탓이다. 이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수출 기업에는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은 “수출 기업은 대부분 가격 경쟁력에 의존하는 데다 세계 경제가 급격한 확장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원화 강세는 기업 실적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무역협회는 국내 수출 기업의 손익분기점 평균 환율을 달러당 1045원으로 분석했다.

◆플라자 합의

1985년 미국·독일·일본·영국·프랑스 재무장관이 모여 일본 엔화값 강세를 유도하기로 합의했다.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논의를 해 플라자 합의라 부른다. 엔화값이 강세가 된다는 건 달러값은 약세가 된다는 의미다. 미국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높여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엔화는 급격히 절상됐고,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 같은 장기 침체에 들어간 원인이 됐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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