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포럼

독자에게 '재미'를 선물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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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말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입니다." 요즘 미술시장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의 답은 명쾌했다. 활황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불황'이란 등식에 하도 익숙해져서인지 그의 말이 잘 믿기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부터 90년대 초까지 반짝하던 미술시장 경기는 이후 끝 간 데 없는 침체의 늪에 빠져 들었다. 필자가 미술담당 기자를 하던 10년 전에도 '몇 년째 계속되는 불황'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그만큼 우리 미술계의 불황은 길고도 모질었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경매시장의 활성화를 첫손에 꼽았다. 서울옥션과 K옥션의 등장으로 경매가 신뢰할 수 있는 유통채널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금리와 정부의 초강경 부동산 대책으로 시중 유동자금이 미술 쪽으로 몰린다는 분석도 있다. 또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가 지난해 폐지된 것도 당연히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시장이 장기 불황을 딛고 일어선 것은 결국 대중에 다가가기 위한 미술인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활황 시절 끼었던 거품가격을 뺐고 이중가격을 없앴다. 경매가 신뢰를 회복한 것도 이중섭 위작 파동을 겪으면서 뼈아픈 자정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가격이 현실화되면서 일반의 관심도 늘어났다. 미술시장의 저변이 확대돼 미술 대중화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물론 미술계에도 부익부 빈익빈, 요즘 유행어로 양극화 현상은 심각하다. 한국미술협회에 가입해 활동 중인 화가 2만2000명 가운데 '팔리는' 화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미술시장 전체의 파이가 커지고 있는 만큼 미술인들의 평균적 형편은 나아질 것이고, 궁극적으로 양극화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일군의 문학담당 기자와 출판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을 보면서 아직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학.출판계의 현실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요즘 '공지영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대부분의 작가가 고전하고 있지만 그의 책은 '여전히' 잘 나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문학.출판계의 서글픈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하다. 잘 나가는 건 여전하지만 부수는 여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봉순이 언니'로 160만 부를 넘긴 베스트셀러 작가가 20만 부를 넘겼다고 '신드롬'이라 부르는 게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문학.출판의 불황은 무엇보다 독자들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왜 독자들이 책을 외면하는가. 무엇보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일전에 잠시 귀국한 황석영 선생도 문학의 위기를 얘기하면서 "서사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어 독자들이 다 달아났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 백낙청 선생이 '한국 문학의 보람'이라고 부른 박민규 같은 젊은 작가들이 나와 문단에 새 힘을 불어넣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인기작가에 대한 쏠림현상이 주는 등 독자층도 다양해지고 있다. 잘 나가는 시집도 꽤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출판계가 살아나기 위해선 독자들의 욕구와 감각,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독자에게 더 다가가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 문학.출판은 미술에서 배울 게 있다.

유재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