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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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놀랍게도 소련에서「레닌」에 대한 호된 비판의 소리가 흘러 나왔다. 소련 작가동맹 기관지 노보이미르 지 5월호는「레닌」이 처형과 과격한 수단을 통해 경제정책을 강행함으로써 부작용을 빚었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그 논문 중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테러를 정당시 한「레닌」의 폭력 대목이다.
「레닌」은 혁명초기 『열 사람중 한 사람은 유죄, 무죄를 불문하고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피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 비율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광신자인 폴란드 태생의 장관「제르진스키」의 지휘하에 신설된 정보사찰기관 체 카는「혁명의 칼」을 육고간의 칼처럼 마구 휘둘러 댄 것이다.
「제르진스키」가 적색테러의 칼잡이라면 「레닌」은 테러의 대변인이었다.「레닌」은 후에 적색테러는 단지 백색테러에 대한 응수에 불과했다고 변명했다.
「레닌」은 투옥이나 사형 외에 아사나 강제노동을 계획적으로 구사하여 현실의 반대자와 장차 반대쪽으로 돌아설 것 같은 사람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다.
『우리는 적에 대하여 가차없을 뿐더러 우리 한 패 중에도 태도가 모호한 분자나 해독을 홀리는 분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전 국민을 죄인시한 협박이며 공갈이었다.
이 같은 광기의 유혈에 대한 항의가 국외에서 빗발치자「레닌」은 『미국 노동자에 대한 공개장』이란 걸 쓴 일이 있다.
『영국의 부르좌지는 1649년이란 해를 잊었고, 프랑스의 부르좌지는 1795년을 잊었다…. 이번에는 노동자와 탐농이 테러를 부르좌지에 대해 사용하니까, 테러는 죄가 되고 잔인하다고 야단들이다.』
「혁명의 칼」은 지방도시에서도 횡행했다. 브리얀스크에서는 주정꾼에게 사형이 적용되었고, 키로프에서는『오후 8시 이후 외출』에도 사형이 처해졌다.
「레닌」의 추종자「지노비예프」는 어떤 인접국가에 대한 담화에서『러시아의 1억 주민 중 9천만을 우리편으로 끌어넣지 않으면 안 된다. 나머지 1천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다. 몰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견적」이 이 숫자로도 부족했음을 실증했다.
그뿐 아니라 역사는 또 하나의 사실을 입증했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어떤 인물도 절대적 진리나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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