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빈민가 '카쇠르' 들 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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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프랑스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불량 청소년들이 정부의 새 노동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던 한 대학생을 집단 폭행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파리 교외의 빈민가 출신으로, 이날 경찰과 시위대 모두에 폭력을 휘둘렀다. [파리 로이터=연합뉴스]

26세 미만 젊은이의 해고를 자유롭게 한 최초고용계약(CPE)에 반대하는 프랑스 학생과 노동계의 연대시위가 벌어진 23일 오후, 파리 중심부 앵발리드 광장에선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나눠주는 등 평화롭게 행진하던 시위대가 괴청년들의 무차별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시위대와 행인을 마구 때리고 휴대전화기를 강탈했으며, 주차된 자동차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카페와 상점 유리창도 박살냈다. 프랑스 정보 당국은 이날 난동을 부린 청년들이 2000여 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했다.

치안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르 피가로 등 주요 신문들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이들이 시위대를 마구 폭행하는 사진을 실었다.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난도 빗발쳤다.

시위 주최 측은 25일 내무부 청사를 방문해 니콜라 사르코지 장관과 면담했다. 이들은 28일 시위 때는 난동꾼들이 날뛰지 못하게 막아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프랑스 경찰은 난동을 막기 위해 28일 시위 현장에 폭동 진압 전문 부대인 공화국보안기동대(CRS)와 사복경찰.정보요원을 대거 투입했다. CRS는 1968년 학생혁명 때와 지난해 인종 분규 소요를 진압한 경찰 특공대다. 하지만 이날 시위도 난동꾼들의 폭력으로 얼룩졌다.

이날 경찰관 한 명이 화염병을 얼굴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경찰은 폭력 시위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했다. 현지 언론들은 "파리 도심에서 젊은이들과 시위 진압 경찰과 충돌하면서 최악의 폭력사태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이 말한 '폭력 시위자'는 세계화에 반대해 거리로 나온 학생과 노동자가 아니다.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학생 모두에게 폭력을 휘두른 이들은 파리 교외 빈민가에서 온 청소년들이다. 프랑스 언론은 이들을 카쇠르(Casseur:파괴자)라 부른다. 지난해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소요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들 카쇠르의 무차별 폭력 행사를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한 끝에 나온 일탈행위"라고 본다. 교외지역 슬럼가의 실업률은 50%로 프랑스 청년 실업률의 두 배, 전체 실업률의 네 배가 넘기 때문에 이곳에 주로 사는 카쇠르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설명이다. 경제적으로 프랑스의 최하층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대학생들도 기득권층으로 보는 것이다.

지난달 시작된 CPE 반대 시위는 이달 들어 카쇠르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어김없이 폭력사태로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경찰에게 유리병과 돌을 던지는 정도였으나 최근에는 경찰.시위대.행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하고 있다.

프랑스 언론과 제1 야당인 사회당, 그리고 교외 지역 시장들은 지난해 소요사태 이후 정부에 소외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 지원책을 마련하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 정부가 일자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들 카쇠르는 언제든지 거리로 뛰쳐나와 소요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도 했다. 그런 우려가 지금 현실이 됐다. 프랑스를 휩쓰는 시위와 폭력의 근원은 결국 일자리 부족이었던 것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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