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죽다 살아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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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14면

미하일 페트라셉스키(1821~1866)의 초상화. 작가 미상

미하일 페트라셉스키(1821~1866)의 초상화. 작가 미상

도스토옙스키의 삶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을 딱 하나만 뽑으라면, 바로 ‘페트라셉스키 서클’ 사건이 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태어났다. 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즉 ‘대문호’이자 ‘예언자’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9>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번째 생

1849년 4월 23일 토요일 새벽 4시. 스물여덟 살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되어 폰탄카 거리의 ‘황제 폐하의 제 3부서’(비밀경찰)로 이송됐다. 곧이어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엘리트 지식인들이 줄줄이 끌려왔다. 그들은 모두 ‘페트라셉스키 서클’의 일원이었다.

페트라셉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통번역 요원으로 근무하던 관리였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매료된 그는 마음이 통하는 몇몇 지인을 집에 불러들여 밤늦게까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며 토론하기를 즐겼다. 참가자 수가 늘어나자 모임은 매주 금요일 밤의 회합으로 정례화됐다. 회원들은 푸리에, 생시몽, 카베의 저술을 읽으며 지상에서 실현될 정의롭고 평등한 천국을 꿈꾸었으며, 사회주의를 성스럽고 도덕적인 이념으로 떠받들었다.

루이 필리프 왕을 폐위시킨 1848년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 황실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정권 유지에 위협을 느낀 니콜라이 1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감시와 검열 제도를 도입했다. 서구의 이른바 ‘위험한’ 사상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의 철학과목을 아예 폐강시켰고, 논리학과 심리학은 신학과 교수들의 손으로 넘겨버렸다. 국경에서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악보를 암호화된 불온문서로 오인해 압수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발생했다. 시국이 이렇다 보니 지식인 회원 수가 30명이 넘는 반체제 서클이 당국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페트라셉스키 사건은 워낙 큰 스캔들이다 보니 꽤 오랫동안 다각도에서 연구가 지속되었다. 1928년에는 전 3권짜리 사건기록이 출간되기도 했다. 설익은 젊은이들의 한담을 정부가 과대평가했다는 주장부터 실질적인 내란 음모였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이 개진됐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강경파’였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집요한 신문에도 배신하지 않은 단 한 명  

알렉세옙스키 삼각보 감옥(19세기 말 사진). 도스토옙스키는 이곳 독방에 수감되었다. 지금은 철거되었다.

알렉세옙스키 삼각보 감옥(19세기 말 사진). 도스토옙스키는 이곳 독방에 수감되었다. 지금은 철거되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네바강 하구 토끼섬에 표트르 대제의 명에 따라 건설됐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네바강 하구 토끼섬에 표트르 대제의 명에 따라 건설됐다.

서클 회원들은 러시아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했지만 실질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다분히 낭만적이고 몽상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만 해도 이 모임에 발을 디딘 것은 박애와 평등을 향한 청년다운 열정, 어린 시절 보고자란 고통에 대한 연민, 독실한 그리스도교적 가정 분위기, 그리고 그의 성격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고질적인 낭만주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고무된 일부 적극적인 회원들은 탁상공론을 중단하고 행동을 개시하기로 작정했다. 도스토옙스키도 여기에 동조했다. 시인 두로프를 중심으로 한 소그룹은 해외에서 발간되는 잡지를 직접 인쇄하고 각종 선전물을 유포하기 위한 지하 인쇄소 설립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실제로 인쇄기 부품을 구입하여 조립하기까지 했다. 인쇄기는 도스토옙스키가 체포될 당시 그의 방 다락에 숨겨져 있었다. 놀랍게도 수사관은 온갖 것을 다 압수해 가면서도 정작 인쇄기가 숨겨져 있던 다락은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딱지만 한 장 달랑 붙여놓았다.

페트라셉스키 회원들은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인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로 이송됐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요새 서쪽의 알렉세옙스키 삼각보 감옥 9호 독방에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동안 나보코프 장군·두벨트 장군·로스토프체프 장군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치밀하게 신문 준비를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고결하게 신문에 임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페트라셉스키도, 조직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냉혹한 혁명가인 스페슈노프도 거의 모든 사실을 다 자백했고 심지어 다른 회원들에게 혐의를 전가하기도 했다.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이른바 ‘동지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발언은 구두로건 서면으로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로프 모임에 대해서도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스스로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은 먼 훗날까지 역경 속에서 그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신문 과정 내내 제가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저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친구의 죄를 감싸줄 기회가 오면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또한 용의주도했다. 형을 낮추기 위해 가능한 모든 전략을 다 동원했다. 서클은 친목 모임에 불과했다, 회장은 그냥 괴짜에다 허풍쟁이로 진지한 일을 도모할 위인이 못 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음모’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라는 게 그가 쓴 자술서의 요지였다. 그는 때로는 고집스러운 침묵으로, 때로는 연막 작전으로 신문관의 울화통을 북돋았다. “당신이 제 영혼을 들여다보기라도 했습니까?”같은 순진무구한 질문으로 사태의 본질을 흐려놓았고 “그 어떤 혐의도 저를 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라는 기이하게 철학적인 주장으로 신문관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어느 날 로스토프체프 장군은 급기야 폭발했다. 능구렁이 장군은 “당신 같은 대단한 소설가가 저런 쓰레기들과 엮이다니 유감이오, 알고 있는 것만 다 말하면 내 직권으로 사면해 주겠소”라며 회유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벨트가 그에게 눈짓으로 말했다. ‘거 보세요,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로스토프체프는 너무나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저 놈 꼴도 보기 싫어!” 로스토프체프는 그를 “영리하고 독자적이고 교활하고 완강한 녀석”이라 부르며 이를 갈았다.

황제의 가짜 사형 집행식이 끼친 영향

9월 30일부터 11월 16일까지 군법회의가 열렸고 마침내 형이 확정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4년간의 징역과 사병 복무 형을 언도받았다. 그 다음으로 러시아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짜 처형식이 이어졌다. 황제는 괘씸한 젊은이들에게 법적인 형벌 이외에 따끔한 ‘선물’을 하나 더 주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일단 죄수들에게 사형을 선고해서 잔뜩 겁을 준 다음 마지막 순간에 감형시켜주어 황제의 전권과 자비에 감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12월 22일, 사형선고를 받은 정치범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세묘놉스키 연병장의 형장으로 이송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째 줄에 세워진 세 명의 사형수 중 하나였다. 사형수들을 향해 총을 겨눈 사격부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일촉즉발의 순간에 갑자기 형 집행 정지가 선포되었다. 황제의 시종무관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사면 소식을 알리며 진짜 선고문을 낭독했다.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 치는 이 사악하고 극적이고 반인륜적인 처형놀이는 엄동설한에 총구를 마주보고 서 있던 정치범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때부터 모든 장난질에 대해 거의 병적인 혐오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에서 게임·놀이·장난질은 여러 가지 변주된 형태로 등장하면서 악을 함축한다.

체포,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숨가쁘게 이어진 사건들은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강렬한 인물과 장면과 소재로 재생되었다. 체포와 신문은 『죄와 벌』의 유명한 형사 포르피리의 탄생에 기여했고, 재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법정공방으로 재현되었다. 처형극의 체험은 『백치』에서 사형수가 처형 직전 5분 동안 겪는 심리변화를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기술하는데 토대가 되었고, 인쇄기 사건은 『악령』의 핵심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인간 도스토옙스키가 진짜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감형 직후 형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자.

“사랑하는 형, 지금 이 순간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옹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죽음과 직면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가 되어서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어. 돌이켜 보니 비방과 실수와 나태 속에서 소중한 것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 몰라. 내 심장과 영혼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몰라….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야. 형! 형 앞에서 맹세할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을 거야. 내 영혼과 심장을 순결하게 간직할 거야.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이것이 내 희망이자 위안의 전부야!”

이 글에 담긴 감사와 환희와 희망은 압도적이다. 종교적 회심에 버금가는 극적인 체험을 통해 그는 실제로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고 “훨씬 더 나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위대한 장편들은 모두 유배 이후 씌어졌다.

물론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라는 생각은 무척 감동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현실에서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때는 마치 심술궂은 악마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이래도 삶을 행복이라 생각할테냐”라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살아있음에서 오는 황홀경은 모든 것을 다 견뎌낼 만큼 강력했다. 지인들 대부분이 인정하듯, 그는 웬만한 고통이나 어려움에 대해서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사소한 기쁨에 대해 늘 감사했으며 인간의 결점에 대해 믿을 수 없이 관대했다.

삶에 대한 이런 태도는 그의 소설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살인, 범죄, 자살 같은 끔찍한 주제가 그의 소설 대부분에 들어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소설이 한결같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그는 형에게 다짐했던 바 그대로 “순결한 영혼과 순결한 가슴”을 간직하려 노력했다. 도덕의 영역에서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작가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도스토옙스키가 그 중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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