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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진화와 미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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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심재우
심재우 기자 중앙일보 뉴욕특파원
심재우 뉴욕특파원

심재우 뉴욕특파원

인간의 유전자는 여전히 진화 중이다. 과학학술지인 ‘네이처 생태와 진화’ 최근호에 이런 현상이 현재진행형임을 밝혀낸 논문이 게재돼 화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벤저민 보이트 연구팀은 2008~2015년 사이에 이뤄진 1000가지 게놈 프로젝트의 데이터를 이용했다. 4개 대륙 2500명의 유전자 정보를 확보한 연구진은 여러 집단에서 나타나는 유전자의 변이 양상을 살폈다. 보이트 연구팀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람의 유전자에서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인 ‘알코올 탈수소효소(ADH)’ 유전자가 특히 강력해진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이 술을 마시면 ADH가 알코올을 분해해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물질로 전환하고, 아세트알데히드는 다른 효소에 의해 아세테이트로 바뀐다. 알코올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작용도 하지만 대부분의 체내 화학반응을 저해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자기 방어 차원에서 알코올 분해에 적극 나서는 것이다. 알코올 분해의 부산물인 아세트알데히드는 우리 몸속에서 숙취를 일으키면서 전날의 과음을 후회하게 만든다. 결국 ADH를 강력하게 변환시킨 유전적 변이는 인간이 술을 많이 마시면 아세트알데히드로 몸을 아프게 만들어 알코올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인간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수천 년 사이에 진행된 진화로 해석된다. 보이트 교수는 “이런 유전자 변이는 알코올 섭취가 많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현상이 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발생했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팀은 말라리아에 저항성을 보여주는 유전자에서도 비슷한 진화 과정을 밝혀냈다. 말라리아는 지난해에만 전 세계적으로 4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도 발병하지 않는 사람의 DNA 정보에서 찾아낸 변이다.

특정 유전자 기능이 강화된 진화가 있다면, 반대로 약화시키는 진화도 가능할 것이다. 최근 들어 거세지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성범죄와 연관된 유전자를 약화시키는 진화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기초연구가 필요하다. 우선 미투 운동으로 가해 사실이 확인된 ‘힘 있는’ 남성들의 DNA를 확보해 성범죄를 일으키는 유전자 연구를 진행해 보자. 성적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분명 문제 있는 유전자가 존재할 것이다. 한 가지 유전자가 아닌 여러 유전자가 관여돼 있는 만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유전자가 가려지면 치료제까지 개발할 수 있는 게 요즘 시대다. 성범죄와 연관된 유전자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치료제가 나오면 먼 훗날 성욕을 못 참는 ‘나쁜’ 유전자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심재우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