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고문법정」의 한풀이|유재식 <사회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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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억이 잘 안난다.』 『웃사람이 시켜서 거짓 진술을 했다.』 『검사가 제멋대로 조서를 꾸민것이다.』
사건발생 1년11개월만인 17일 오전인 천지법에서 열린 부천서 성고문사건 첫공판. 문귀동피고인은 범죄사실을 모조리 부인했다. 진술태도도 뻔뻔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저놈을 물고문·전기고문 시켜라.』 『가위로 잘라 버려라.』 『성고문 시켜라.』
예상했던대로 법정의 소란은 엄청났다.
구호들은 점점 옮기기 힘들 정도의 욕설로 변했다.
『개××』 『××놈』은 예사였고 실제로 가위를 들고 덤비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긴강한듯한 표정이던 문피고인은 방청석의 욕실이 계속되자 오히려 느긋한 표정으로 변했다. 「될대로 되라」는 뜻인지 얼굴에는 싸늘한 웃음기를 머금기도 했다.
방청객들의 분노는 점점 격한 행동으로 변했다.
10여개의 날달걀이 피고인을 향해날아갔다. 야쿠르트법이 재판부폭으로 던겨졌다. 뚜껑을 연 잉크병이 문피고인의 머리를 맞힌뒤 방청석으로 튀어 앞줄 부근의 7∼8명은 잉크세례를 받았다.
재판은 몇차례 중단됐고 장내를 정리하던 정리는 신짝으로 따귀까지 얻어 맞았다.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법정에서 카메라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졌고 법정의 유리창틀에까지 방청객이 걸터 앉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과 딸·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다 쓰러지고 감방에 끌려간 이후 그 숱한 밤을 눈물과 한속에 보내온 이들의 「한풀이」를 비난만 할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무조건 부인만 해대는 문씨가 뻔뻔스럽고 가증스러웠을 수도 있다. 아니 실컷 두둘겨 패고 고문을 해도 이들에겐 성이 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법대로 재판을 진행해 나가는 재판부가 답답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만일 이날 법정분위기가 숙연할 정도로 질서가 유지됐다면 문피고인이 그토록「뻔뻔스럽게」부인만 해댈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잉크세례를 본 권인숙양의 찡그린 얼굴에서, 또 『진실은 재판에서 밝혀져야 하는데…』하며 말끝을 흐리는 변호인단의 독백에서 우리나라 민주화의 진통을 절감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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