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파일] 몰카 속 그는 피해자 ? 가해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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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주택가 골목길을 비추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흡사 정지된 듯 보인다. 좀 의아하다 싶을 무렵에야 비로소 화면 속에 행인이 등장하고, 화면 밖의 대화를 통해 관객은 그 정체를 알게 된다. 누군가 주인공의 집 앞을 몰래카메라로 장시간 찍어 보낸 것이다. 이 낯선 도입부에서 짐작하듯, 영화'히든'(감독 미하엘 하네케, 30일 개봉)은 별것 아닌 듯한 몰카비디오를 계기로 프랑스 중산층 가정이 위기에 빠지는 모습을 탁월한 심리묘사로 그려낸다. 미리 밝혀 두지만, 이 영화가 주는 충격은 범인의 정체 때문이 아니다. 제목에 나오는 대로, 카메라를 '감춰둔'(Hidden) 누군가를 추적하면서 영화는 주인공이 감춰둔 과거의 죄의식을 수면 위로 끄집어 낸다. 그 결과는 지식인의 이중적인 내면에 대한 신랄한 폭로다.

주인공 조르주(다니엘 오테이유)는 프랑스 TV의 문학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제법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다. 자연히 부인 안(쥘리에트 비노슈)은 문제의 비디오가 남편의 광팬이 찍어 보낸게 아닐까 하면서도 막연한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반면 조르주는 함께 배달된 낙서 같은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잠시나마 낯빛이 변한다. 조르주가 어려서 자란 교외의 저택 따위를 찍어보낸 비디오가 연달아 배달되면서 부부는 신경질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딱히 위협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찰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혼자 남모를 짐작을 하던 조르주는 이 기분나쁜 장난질을 하는 범인을 직접 추적한다. 새로 배달된 비디오 속에 등장하는 낯선 거리를 찾아간 조르주는 묻어 두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사건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 모종의 사건은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억압,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되는 인종적.계층적 차별과 연관돼 있다. 이 심리스릴러가 뛰어난 점은 이처럼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어쩌면 가장 아픈 대목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동시에 팽팽한 심리적 긴장을 결코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악몽에 시달릴 만큼 어린 시절의 사건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이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적인 책임감으로 억누르는 조르주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다. 부인 안은 혼자 비밀을 안고 있는 듯한 남편을 의심하게 되고, 아들마저 위험에 빠진 듯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조르주의 내면에는 걷잡을 수 없는 균열이 벌어진다.

이제 관객은 몰카사건의 일방적인 피해자로 보였던 조르주의 얼굴에서 가해자의 잔인함을 읽게된다. 이처럼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면서 영화는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불안을 전염시킨다. 벽면에 빼곡하게 책을 꽂아둔 지식인 조르주의 이중성이 당신의 경우도 혹 마찬가지 아닐까라는 듯한 태도다.

독일 태생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자란 미하엘 하네케는 관객이 불편할 정도로 냉소적이고 엽기적인 시선으로 '퍼니게임''피아니스트'같은 문제작을 만들어온 감독이다. '히든'은 그보다는 덜 공격적이면서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집히는 역설의 여운은 한결 강렬하다. 지난해 칸 영화제는 범인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감독상을 안겨주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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