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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보팅 폐지 후폭풍 … 516개 상장사 감사 못 뽑을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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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섀도보팅

섀도보팅

기능성 화장품 원료를 생산하는 코스닥 상장사 에이씨티는 지난 13일 임시주주총회를 열었다. 첫 번째 안건인 주식 분할은 부결됐다. 이 때문에 액면가 500원짜리 주식을 100원짜리 5주로 쪼개는 회사의 계획이 무산됐다. 주주들이 반대해서가 아니다. 정족수 미달이 문제였다.

3월 주총시즌 앞두고 정족수 비상 #불참자 의결권 대리행사 못하게 돼 #소액주주 많은 곳 정족수 확보 곤란 #사태 내다본 81곳 연말 앞당겨 주총 #정족수 완화 재계 요청에 정부 냉담 #이달 국회서 재논의하기로 해 주목

주식 분할, 정관 변경 등은 주총 특별결의에 해당한다. 이때는 출석한 주주가 보유한 주식의 3분의 2 이상 찬성에다 의결권 있는 주식의 3분의 1 이상 찬성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날 주총에 참석한 주주들의 주식은 전체의 28%(위임장 포함)에 그쳤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240억원에 영업이익 4억원을 기록했다. 회사 관계자는 “섀도보팅이 없어지며 주총 정족수를 채우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며 “감사를 선임하는 정기 주총은 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른바 ‘섀도보팅(그림자투표)’이 지난해 말로 폐지되면서 상장사 주총에 비상이 걸렸다. 섀도보팅은 주총 참석이 어려운 주주들 대신 한국예탁결제원이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다. 섀도보팅은 1991년 도입했다.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국내 증시의 종합주가지수(현 코스피)는 1989년 3월 사상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다. ‘개미군단’으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이 급격히 늘었다.

대다수의 개인 주주들은 투자 수익에만 주목하고 주총 참석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총에서 정족수를 채우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 섀도보팅이었다. 이후 26년간 섀도보팅은 상장사 주총을 원활하게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비판도 적지 않았다. 대주주에게 유리한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 남용되고, 주총을 형식적으로 치러지게 한다는 지적이 대표적이었다. 결국 2013년 자본시장법 개정 과정에서 섀도보팅 관련 조항이 삭제됐다. 하지만 부칙에서 지난해 말까지 유예기간을 뒀다. 전자투표를 도입한 곳에 한해서였다.

12월 결산 상장사들은 이듬해 3월 말까지 정기 주총을 열어야 한다. 올해부터 섀도보팅 없이 정족수를 채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주식이 고르게 분산돼 소액주주들의 지분율이 높은 회사일수록 고민이 많다. 이런 회사는 일반 결의 정족수(발행 주식 25% 이상)를 간신히 채우더라도, 특별 결의 정족수(3분의 1 이상)까지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특히 감사(감사위원 포함) 선임이 문제다.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3% 룰’ 때문이다. 예컨대 최대주주가 30%의 지분을 갖고 있더라도 감사 선임에는 3%까지만 인정한다. 정족수(25% 이상)를 채우려면 다른 주주 2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감사를 뽑지 못하면 과태료(최대 5000만원)를 내야 하고, 증시에서 관리종목으로 지정될 수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올해부터 3년간 516곳의 상장사가 정족수 문제로 감사 선임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지난해 4분기로 일정을 당겨서 임시 주총을 연 상장사는 81곳에 달했다. 상장사협의회는 지난달 법무부에 제출한 건의문에서 “(3% 룰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업 규제로 상법상 대원칙인 주주평등원칙에 어긋난다”며 “해외 투기자본에 의한 경영권 위협수단으로 악용 위험도 크다”고 주장했다.

정부와 금융감독원·한국거래소가 제시하는 대안은 전자투표의 활성화다. 주주들이 직접 주총에 참석하지 않아도 PC와 스마트폰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올해는 전자투표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경품도 등장했다. 예탁결제원은 하루 1000명씩, 총 3만 명의 전자투표 이용자에게 1인당 5000원짜리 모바일 상품권을 나눠줄 계획이다.

소액주주들이 얼마나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2~3월 정기 주총을 연 상장사 중 전자투표를 채택한 곳은 705곳이었다. 이 중 전자투표(전자위임장 포함)에 참여한 주주는 1만2800명으로 집계됐다. 상장사 1곳당 평균 18명이다. 전체 주주 수의 0.2%에 그쳤다. 주식 수 기준으로는 2.2%(기관투자가 포함)다.

이 때문에 주총 정족수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일본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정족수를 두지 않거나, 회사 정관에서 자유롭게 정하도록 했다”며 “한국도 발행 주식의 25%나 3분의 1 같은 규정을 없애고 출석한 주주들의 결정에 맡기도록 상법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섀도보팅을 연장하자는 상장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법안(자유한국당 김성원 의원)도 제출됐지만 정부와 여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국회 정무위원회는 2월 임시국회에서 다시 논의한다는 여지를 남겼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해 말 국회에서 “만에 하나 사회적으로 부작용이 너무 크면 1년 정도 한시적으로 제도를 다시 살리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섀도보팅(Shadow Voting, 그림자투표)

주주총회에 불참한 주주의 의결권을 한국예탁결제원이 대신 행사하는 제도. 주총에 참석한 주주들이 찬성 또는 반대한 비율과 똑같은 비율로 투표가 이뤄진다. 예컨대 10%의 주주가 주총에 참석해 찬성 6%, 반대 4%였다면 나머지 90%의 주주도 같은 비율로 투표한 것으로 간주한다. 주총에서 의결 정족수를 채우기 어려운 점을 보완하기 위해 1991년 도입했지만 지난해 말 폐지됐다.

주정완·이현·성지원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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