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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에너지를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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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런 독일 노조가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1990년 10월 통일 이후 독일에선 전체 근로자의 44%가 노조원이었다. 그러나 2004년 말 독일의 노조조직률은 22.3% 급락했다. 노조에 대한 노동자의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것이다.

독일노동총동맹(DGB) 산하 한스뵈클러 연구소의 도르스텐 슐텐 박사는 "시장주의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노조원들 스스로 노조를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생각하게 됐고, 결국 노조원의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경제의 변화를 예로 들었다. 산업구조가 서비스업과 하이테크산업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고 전통적으로 노조가 강세를 보이던 제조업과 공공부문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슐텐 박사는 "산업구조의 개편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가져왔는데 이는 고용 안정을 요구하는 노조의 기본 방침과는 다르다"며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런 변화를 수용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노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의 노조는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 슐텐 박사의 진단이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의 노조조직률은 80년대 초반까지 20%를 웃돌았다. 지금은 노조조직률이 10%가 채 안 된다. 노동계를 이끌고 있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산업구조는 변하는데 노조만 옛날의 투쟁 방식을 그대로 가져가며 대중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슐텐 박사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단은 비슷하다.

원인을 안다면 해결책도 나오기 마련이다. 독일을 먼저 보자. 독일 정부는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2003년 6월 '어젠다 2010'이라는 개혁프로그램을 내놨다. 해고와 고용을 보다 쉽게 하고, 최장 32개월까지 지급하던 실업급여를 55세 미만은 12개월, 55세 이상은 18개월로 단축하는 등 각종 사회보험 혜택을 축소하는 것이 골자다. 독일 노조는 시위로 맞섰다. 노총의 지침에 따라 500만 명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슐텐 박사는 "지금 독일의 노조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어젠다 2010 프로그램을 개정하기 위해 정부와 협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경우 한국노총이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타결을 목표로 대안을 내놓는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대중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선언했다. 비정규직보호법안에 대해서도 길거리로 가는 대신 수정안을 내놓으며 타협점을 모색했다. 독일 노총의 한국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아직도 장외투쟁에 힘을 쏟고 있다. 그들이 변화에 둔감해서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지난달 21일 민주노총 위원장 보궐선거에서 대화와 타협에 무게중심을 두는 국민파의 조준호씨가 새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런데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젠 끝까지 가서 깨지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1년도 채 남지 않은 조 위원장의 입지를 고려할 때 내년 2월 선거에서 다시 국민파가 당선되려면 세를 규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명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노동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계파싸움, 즉 권력화를 생각하다 더 큰 것을 잃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얘기한다. 최근 정부와 경영계는 물론 노동계 인사들조차 "우리의 노동운동은 에너지에 비해 실속이 없다"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노동계가 투쟁에 쏠린 에너지를 대화와 타협의 에너지로 바꿔 실속도 차리고 국민과 노동자의 사랑도 받는 조직이 됐으면 한다.

김기찬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