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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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번 4·26 선거는 우리나라 정치사에 길이 남을 신기록들을 많이 탄생시켰다. 후세 사학자들과 정치지망생들을 위해서도 그 신기록들을 여기 밝혀 두려고 한다.
첫째,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들이 제시되었다. 두 칸 짜리 오두막에 1백88명이 함께 살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전북 어느 고을의 주민등록 카드를 들추어보면 알 수 있다.
둘째, 한 유권자에게 무려 1백10장이나 되는 투표용지를 교부한 경우가 있었다. 위임장도 아닌데 그 많은 투표지를 다 어디다 쓰려고 했는지 보통사람의 궁리로는 알 수가 없다.
세 째는 선거자금을 한푼의 누락이나 누수(누수)없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먼저 편지 봉투에 방을 사람의 이름과 주소만을 쓰고 그 속에 상당한 현금과 보내는 사람의 인사 장을 넣어 우체국에 의뢰하는 방식이다.
그 숫자는 4천2백96명도 좋고 몇만 명인들 어떻겠는가. 돈이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서 머리를 썩 잘 썼다.
네 째는 흑색선전 기술의 발전이다. 나라 살림이 중진국쯤 되니까 복사기가 두루 보급되어 웬만한 인쇄물은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투표일 하루 전에 아무개가『통일교 돈을 얼마 받았다더라』『깜둥이 아들은 어디다 감추었나』와 같은 기발한 흑색선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다섯째, 선거를 법대로 하는 얼간이는 우리 정치풍토에 더 이상 없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포스터는 돈이 닿는 대로, 좋은 제스처가 생각나는 대로 찍고 또 찍어내, 붙이고 또 붙이고 동내방내 칠갑팔갑을 하는 것이 좋다.
요즘 사람들은 건망증이 심해 포스터 한 장쯤으로는 안중에도 없다.
끝으로 진짜 기록은 입심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품, 신망, 학식, 경륜 따위는 뒷전이고, 첫 째는 마구잡이로 상대를 깎아 내려야 나 잘난 것을 돋보일 수 있다. 정치 지망생이 웅변학원 다니는 것은 옛날이고 험담 강습소를 다니는 편이 훨씬 정치가로 성공을 약속 받을 수 있다.
이제 그런 신기록들의 대 행진은 끝나고 남은 것은「상처뿐인 후유증」일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이런 성가시고 골치 아픈 일로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말인가. 선거를 치르고 나서도 그저 찝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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