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헌법이 정치권끼리 주고받는 상품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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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제 당론으로 확정된 더불어민주당의 개헌안 내용과 발표 과정의 해프닝을 보면 우려와 탄식이 절로 나온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헌법 4조에서 ‘자유’를 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가 4시간 만에 현행대로 유지한다고 번복한 것이다. 민주당 측은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의원총회 결과를 전하면서 제윤경 원내대변인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보다 넓은 의미의 민주적 기본질서로 수정키로 했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착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자유’ 없는 ‘민주적 기본질서’는 #‘인민민주주의’도 포함된 개념 #그런 통일 바라는 국민은 없다

실제로 ‘자유’가 빠진 ‘민주적 기본질서’는 지금까지 일부 진보 역사학자들이 꾸준히 주장해온 ‘도그마’다. 제 대변인의 설명대로 보다 넓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오늘날 남한의 정치체제인 자유민주주의를 통일 이후에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통일 이후의 정치체제는 북한 주민의 의견까지 들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 등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 중에서 국민이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편향 논란이 됐던 국회개헌자문위의 시안에 ‘민주적 기본질서’로 돼 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국가의 정체성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보편적 참정권, 자유·평등 선거를 바탕으로 한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시민권을 보장함으로써 파시즘과 구별된다. 또 다당제를 통해 일당독재를 부정하고 자유시장경제의 가치를 존중해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게 자유민주주의다. 과거 군부독재 정권이 권위적 반공주의를 미화하는 데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을 남용한 바가 있다고 해서 이런 정체성이 부인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통일이 된다고 해서 정체성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 국민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자유’를 빼려는 움직임에 대해 민주당 의원 120명 중 70명 이상이 반대했다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민주당 개헌안에 있는 ‘사회적 경제’와 ‘토지 공개념’을 강화하는 내용들이 선의로만 해석되지 않는 것도 그처럼 국가의 정체성을 흔들려는 저의가 느껴지는 까닭이다. ‘촛불 시위’와 같이 역사적 평가와 국민적 합의가 좀 더 필요한 사안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헌법은 국가 통치의 기본 원리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근본 규범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의 주장이 아닌 보편적 합의가 담겨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편적 합의는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개헌의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그건 놔두고 정권을 가졌다고 해서 멋대로 국가 정체성을 바꾸려 드는 것은 그런 시대적 요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당도 여소야대 국면에서 이런 개헌안이 통과되리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대야(對野) 협상용, 지지층 결집용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인데, 정말 그렇다면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헌법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있는 상품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