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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르티네스 감독 "한국팀이 정말 고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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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회 초 1사 2,3루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결승 2루타를 날린 이종범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1루로 뛰어가고 있다. [애너하임 로이터=연합뉴스]

5회 말 일본의 공격이 끝났을 때까지도 전광판에는 0의 행진이 계속됐다.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오사다하루(王貞治) 감독의 얼굴이 씰룩였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없는 감독이지만 초조한 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일본 타자들은 한국 선발 투수 박찬호의 공을 따라다녔다. 기다렸다가 받아치는 여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국의 김인식 감독은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박찬호의 등을 두드렸다. 오사다하루 감독보다 더 포커페이스인 김 감독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3~4회만 막아줘도 괜찮다"고 했는데 그 이상 역할을 해준 맏형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같은 시각, 본부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벅 마르티네스 미국 감독의 가슴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한국이 이겨줘야 4강 진출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한국은 5회까지 일본 선발 와타나베에게 단 1안타로 눌리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큰 점수 차로 이겨도 4강 희망이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 에인절 스타디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2라운드 한.일전은 한국과 일본, 미국이 벌이는 야구 삼국지였다. 경기장을 뒤덮은 한국 응원단은 파도타기 응원까지 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했고, 그 속에 둘러싸인 일본 응원단은 작은 목소리로 일본을 응원했다. 그리고 몇 명 보이지 않는 미국 관중은 노골적으로는 못하고 속으로만 열심히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날 경기에 나서는 일본 선수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한국이)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을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면서 큰소리쳤다가 1라운드에서 역전패한 뒤 "굴욕"이라고 말했던 일본의 자존심 스즈키 이치로는 "배우는 자세로 임하겠다"고 했다. 한국에 두 번 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이치로는 1회 말 선두 타자로 나와 중전 안타를 쳐냈으나 7회까지도 0-0의 점수가 계속되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8회 초, 김민재의 파울볼을 잡으려던 이치로는 관중과 겹치면서 공을 놓치자 발로 걷어차는 동작을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관중석에서는 당장 "우~"하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9회 말 일본의 마지막 공격. 굳은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앉아있는 이치로의 얼굴이 자주 TV 화면에 비쳤다. 2사 1루에서 마지막 타자인 다무라가 헛스윙 삼진을 당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분을 참지 못한 이치로가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타격왕에 오르고, 2004년 한 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까지 세운 일본의 최고 타자가 한국 야구에 두 번째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7회까지 1안타밖에 치지 못한 상황에서도 김인식.선동열.김재박 등 한국 코칭스태프의 얼굴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김인식 감독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선동열 투수 코치는 가끔 웃음을 지었다. 이미 경기장의 분위기는 1라운드에서 한국이 3-2로 역전승할 때와 비슷하게 흐르고 있었다.

8회 초, 일본의 3루수 이마에가 실수를 했다. 이병규의 중전 안타 때 1루 주자 김민재가 3루까지 뛰었다. 중견수 긴조의 3루 송구는 김민재보다 빨랐다. 완전한 아웃 타이밍. 그러나 이마에가 공을 놓쳤다. 평소대로라면 나올 수 없는 어이없는 실수. 이마에는 얼른 공을 집어 심판을 속여 보려 했지만 3루심은 정확하게 세이프를 선언했다. 일본의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마에의 실수로 한국은 1사 2, 3루의 찬스를 잡았다. 이때 타석에 나온 선수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종범이었다. 이종범이 좌중간을 깨끗이 가르는 2루타를 때려내는 순간 더그아웃에서 내내 서서 경기를 지켜보던 오사다하루 감독이 뒤로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서 '또 지는구나'하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 순간 김인식 감독보다 더 기뻐한 사람은 바로 마르티네스 미국 감독이었다. 이미 자존심을 버린 마르티네스 감독은 "내 평생 이렇게 마음을 졸이면서 본 경기가 없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는 "정말 한국이 고맙다"였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한국에 두 차례나 1점 차 패배를 당해 4강 진출의 희망을 잃어버린 오사다하루 감독은 "꼭 이기고 싶은 경기였다"고 토로했다. 그는 "일본 선수들의 의지도 강했지만 한국의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했다"는 말로 한국의 승리를 인정했다.

한국 선수들은 대형 태극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며 환호하는 한국 응원단에 인사했고, 서재응은 소형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았다. 한국 야구가 야구의 본고장에서 정상에 우뚝 섰다는 의미였다.

애너하임=이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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