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CoverStory] "엄마, 저 별 꼭 따 드릴게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지난 주말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600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잠을 잊은 채 TV 수상기 앞을 떠나지 못했다. 축구경기 때문이 아니었다. '독일은 수퍼스타를 찾는다(Deutschland sucht den Superstar)'는 프로그램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독일 최대 민영방송인 RTL이 신인가수를 발굴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다. '2006년 수퍼스타'를 뽑기 위한 결승 진출자 두 명을 가리는 순간이었다.

70년대 서독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의 혼혈 2세
독일 최대 민영방송 RTL 신인가수 선발 프로서
7036 대 1 경쟁 뚫고 결선에 … 현지 언론 관심 집중

이날 밤의 스타는 단연 마이크 레온 그로슈(29)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오는 동안 온 독일을 뜨겁게 달군 청년이다. 그는 이날도 수백만 시청자의 전화 투표 결과 영예의 1위를 차지했다. 결승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수백 명 팬의 환호를 뒤로 하고 방청석으로 달려가 응원 나온 중년 여성을 얼싸안았다. 어머니 서성윤(53)씨였다. 낯선 이름의 이 청년이 한국계였던 것이다. 마이크의 눈에도, 파독 간호사 출신인 어머니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마이크의 인생 스토리를 듣다 보면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가 생각난다. 혼혈 2세로 시련을 딛고 '인간승리' 드라마를 엮어냈다는 점 말고도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공교롭게 나이도 76년생 동갑이다. 네 살 때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가 혼자 길렀다는 점도 비슷하다. 기억에서 사라진 아빠를 기다리며 어린 혼혈 2세가 겪었을 마음 고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인스와 마찬가지로 마이크도 땀 흘리며 묵묵히 일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마이크의 사춘기는 남달리 외로웠다. 또래 친구들이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외국에 있다는 아버지는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외모 콤플렉스로 속앓이도 많이 했다. 13세 때 돋기 시작한 여드름이 얼굴과 등까지 퍼져 흉터로 남았다. 지금도 뺨에 2㎜나 깊게 파인 자국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마이크는 당시 괴로웠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했다.

"급우들은 모두 여자친구를 사귀는데 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래서 위안을 삼으려고 스포츠에 몰두했지요."

그는 역기를 들며 울분을 토해냈고, 복싱을 시작해 샌드백을 치며 분노를 달래기도 했다. 자신의 흉한 상처를 가리기 위해 항상 남보다 튀는 차림을 하고 다녔다. 오른쪽 가슴에 문신을 하고 피어싱을 한 것이 이때다.

자칫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 있던 상황도 숱하게 있었다. 그러나 고비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온갖 궂은 일로 성할 날 없었던 험한 어머니의 손을 보며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꼭 성공해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 드릴게요".

하인스 워드와 76년생 동갑인 휴대전화 판매원
네 살 때 아버지와 헤어져 엄마와 단둘이 생활
사춘기 방황 … 고생하는 어머니 보며 마음 잡아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 내일 운명의 무대 V카운트는 시작됐다

*** 아, 어머니

밤낮으로 일하며 홀로 외아들 키워

마이크의 어머니 성윤씨는 병원에서 주당 40시간을 일하며 마이크를 뒷바라지했다. 밤낮으로 불규칙하게 돌아가는 교대근무를 하고 파김치가 돼 집에 돌아왔다. 5층 계단을 올라 방 두 칸 집에 들어서면 집안일이 늘 쌓여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밥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마이크에게는 꼭 더운 밥을 지어 먹였다. 당연하게 여기던 이런 엄마의 사랑을 마이크는 철이 들면서 깨닫게 됐다. 그러나 그는 "남자라서 그런지 고맙다는 표현을 제대로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성윤씨 역시 "원래 다른 어머니들도 다 그러지 않느냐"고 겸연쩍어 했다.

마이크의 직업은 휴대전화 판매사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붙임성이 좋고 쾌활한 젊은이는 직장에서 금방 인정을 받았다. 외판 사원에서 세일즈 매니저로 승진했다. 간신히 붙잡은 안정된 생활 속에서도 그는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만의 성취를 이루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은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저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노래였다. 제대로 된 음악교습을 받지는 못했다. 취미 삼아 친구들과 어울려 지하실에서 밴드 연습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노래 선생님도 따로 없었다. 유명 가수들의 음반을 사서 수시로 흥얼거리며 흉내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청소년 시절부터 책보다는 노래 CD나 카세트를 자주 사들고 오다 어머니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교수가 되기를 꿈꿨던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에 더 열심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이크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로 최고가 되고 싶었다.

이모 서지영(46)씨는 "한두 번 들으면 곧바로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감과 끼를 가졌다"고 기억한다. 지금도 10대 때 서너 번 들었다는 가수 박남정의 '사랑의 불시착'을 또렷하게 기억해 부를 정도다.

*** 그래, 결심했어

나이 제한 완화로 기회 … 마지막 승부수

그는 틈틈이 아마추어 가수로 활동했다. 친구들의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가라오케 무대에서 실력을 가다듬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주변에서 실력 있는 가수라는 칭찬을 받기는 했지만 직업가수의 길은 여전히 멀었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RTL 방송에서 신인가수를 캐스팅하는 프로그램에 나가 보라고 친구가 귀띔한 것이다. 마이크는 망설였다. 본선에 진출하기 위한 예선 평균 경쟁률이 1000 대 1. 참가자의 대다수가 풋풋한 10대와 20대 초반이라 경쟁에서 살아남을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비겁한 자는 천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한 번 죽을 뿐이다." 마이크가 평소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던 미국 체로키 인디언의 금언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독일 주류사회에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뒷걸음칠 때마다 이 구절을 읽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사실상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었다. 나이 제한이 이번 대회부터 30세까지로 상향 조정됐기 때문이다. 지난 대회는 20대 중반까지만 허용돼 마이크가 참가할 수조차 없었다.

우승만 한다면 무명가수의 설움을 씻고 단숨에 수퍼스타가 될 수 있다는 기대로 맘이 설렜다. 사실상 10명이 참가하는 최종 본선에 오르기만 해도 스타로서 대접받는다. 이들의 대표곡을 모은 CD가 발매돼 400만~500만 장이 팔려 나가고 수시로 TV에 얼굴을 내비칠 수 있다. 유럽 전역의 600만~700만 시청자가 지켜보는 인기 프로라서 가수 개개인의 사생활은 물론 모든 활동이 시시콜콜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유명하다. 우승하게 되면 세계적인 음반사인 BMG가 음반을 내주며 단숨에 최고 인기가수로 인정받는다. 대우가 파격적인 만큼 선발 과정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까다롭다.

*** 피말리는 대결

본선 진출 10명 … 매주 한 명 탈락

베를린.쾰른 등 독일 8대 도시에서 시작한 첫 예선 대회에는 1만4072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한 달 반 동안 심사위원들이 120명을 솎아내는 1차 관문을 통과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었다. 참가자들은 웬만한 체력과 정신력을 지니지 않고는 배겨내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소화해야 하고 가창력, 발전 가능성, 무대 매너, 가수로서의 내면적인 성숙도 등 꼼꼼하고 까다로운 검증을 받는다. "어디에 내놓아도 예비 스타로서 손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방송국 측은 설명한다. 20명을 고르는 2차 선발 대회부터는 시청자가 참여한다. 심사위원단은 가수의 노래를 들은 후 심사평을 할 뿐이다. 걸려오는 시청자의 유료 전화통화 수를 집계해 최종 결정을 한다. 본선 무대에 오른 10명의 예비 스타는 지난해 11월 16일부터 숨막히는 경쟁을 벌여 왔다. 매주 한 명씩 탈락해야 하는 가혹한 승부의 세계였다. 심사위원단이 지정해 주는 장르의 곡을 불러야만 한다. 특정 분야 노래만 잘 불러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오후 9시15분 시작하는 선발 쇼는 독일 전역에 '수퍼스타 붐'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본선 참가 가수의 수가 줄어들 때마다 시청자들의 관심은 더욱 치솟았다. 토요일 저녁만 되면 14~49세의 독일 시청자 61.8%가 이 프로그램을 지켜볼 정도다.

만나는 사람마다 화제는 다음에 누가 탈락할 것인가다. 참가자 개개인의 인터뷰와 무대 뒤편의 에피소드를 다룬 프로그램이 따로 편성될 만큼 시청자들의 관심은 뜨겁다.

*** 산 넘어 산

직장 문제 해결되자 염문설 파문

마이크는 단연 돋보였다. 한 심사위원은 "선발 과정에서 지켜본 가수 가운데 최고의 기량을 지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준결승에 오르기까지 고비도 적지 않았다. 첫 번째 위기는 1월에 찾아왔다. 마이크가 승승장구하면서 직장복귀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최종 본선에 진출하면 합숙하며 공식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직장근무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본선 대회를 계속 치르느냐 사표를 내느냐의 갈림길에 선 마이크는 고민했다. 팬들의 성원은 뜨거웠다. 마이크 팬클럽이 잇따라 만들어지며 "포기하지 말라"는 호소가 여론을 이끌었다. 심사위원들도 안타까워했다. 결국 마이크의 직장에서는 특별한 예외를 인정하기로 했다. 본선을 마칠 때까지 무급휴가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준준결승에서도 팬들은 마음을 졸였다. 마이크가 동료 참가자인 여가수와 사랑에 빠져 다소 흔들렸기 때문이다. 미모의 여가수인 바네사는 흑인 혼혈 출신이다. 청바지 가게 점원을 하다 단번에 스타가 된 그는 마이크와 운명적 사랑을 선택했다. 혼혈 2세로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유럽 최대인 400만 부를 발행하는 일간지 빌트차이퉁은 연인 관계로 발전한 마이크-바네사 커플 이야기를 1면 머리기사로 올리며 흥분했다. '사랑이냐 승부냐'. 연인 관계를 당당히 선언한 두 사람은 위기상황을 맞았다. 실망한 10대 시청자 팬들이 등을 돌릴 가능성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대에서 듀엣으로 열창하며 사랑을 키웠다. 심사위원들의 시선도 차가웠다. 일반 시청자는 알아챌 수 없는 미묘한 실력 차이를 정확히 집어냈다. "노래에 집중을 못했는지 최고의 기량을 못 보였다"며 서슬 퍼런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마이크를 선택했다. 현지 언론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사랑을 숨기지 않는 솔직함과 진지한 자세가 오히려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 마침내 …

한국계 수퍼스타로 우뚝 설 것인가

11일 치러진 준결승에서 마이크의 실력은 다시 빛을 발했다. 마음을 다잡고 열창한 그는 이날 최고의 성적으로 너끈히 결승 진출이 확정됐다. 심사위원 디터 볼렌은 "더 이상 휴대전화를 파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며 "최고의 가수"라고 격찬했다. 연인이던 바네사는 아쉽게 3위로 밀려나 연인끼리의 대결은 무산됐다. 이날 2위로 결승에 오른 상대는 남부 바이에른 출신의 근육질 가수 토비아스다. 전형적인 중산층 독일 가정 출신으로 뛰어난 가창력과 겸손한 태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과연 마이크가 한국계 수퍼스타 가수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인가. 18일 밤에 열릴 결승전을 앞두고 독일 시청자들의- 관심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