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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보위 발족 명분 광주 사태서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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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보위의 인선과 출범 준비를 논의한 80년5월28일, 경복궁 멤버 회의의 핵심은 이른바 12·12사건 직후 「3장군」으로 불리던 전두환 중장 (보안 사령관) 노태우 소장 (수경 사령관) 정호용 소장 (특전 사령관)과 보안사의 허화평·허삼수 대령 등이었다.
이중 정호용 소장은 12· 12당일 경복궁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핵심 세력이었고 백운택 준장(육사11기·작고) 같은 이는 참석했지만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또 박희도·박준병씨 (이상 12기) 장세동씨 (16기) 등은 핵심이었지만 국보위 일에는 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경복궁 멤버 회의는 12·12당일 경복궁에 모였나 안 모였나를 떠나 전두환 장군이 이끈 신 군부 세력에 동조해 정승화 세력을 제거하는데 직·간접으로 역할을 한 군부 내의 새로운 파워 엘리트들을 통칭하는 표현이었다. 더 좁혀 말하면 「3장군」을 지지한 일부 군 선배와 정규 육사 출신 중 주축을 의미했다.
수시로 열렸던 경복궁 멤버 회의는 뚜렷한 격식이나 의사 일정에 따라하는 회의는 아니었다. 신 군부의 주축이 전두환 장군이다 보니 주로 보안 사령관실에 자연스럽게 모여 시국 걱정도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는 비공식 모임이었다.
자주 참석한 사람은 「선배」 중에서 유학성·황영시·차규헌 중장, 11기의 3장군, 12기의 박희도·박준병·박세직, 13기의 최세창, 14기의 이종구·안무혁·이춘구, 15기의 권병식·민병돈·이진삼·고명승, 16기의 장세동·최평욱·정순덕, 17기의 허화평·허삼수·김진영·이문석·임인조, 18기의 이학봉씨 등이었으며 권정달 보안사 정보 처장도 실무 간사 역할을 했다.

<회위는 거의 형식적>
물론 이들이 늘 다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회의는 대부분 보안사 참모들이 만든 당면 계획을 확인·검토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군부 내에 일체감을 조성해 전 장군을 감싸주는 울타리 역할이 진짜 목적인 듯 했다. 참석자 중에는 군내 긴책 상 국보위가 정식 발족하기 전까지는 가끔 외출 나와 동료들의 움직임을 듣고 가는 정도의 역할 밖에 못한 사람도 있었고 끝내 배후에 있으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군에 되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아뭏든 국보위 설치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5월27일부터 1차 회의가 열린 31일 사이 보안사 참모들과 경복궁 멤버들은 국보위 구성과 광주 사태 마무리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었다.
당연직 국보위원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기적으로 주재하던 안보회의의 멤버에다 군 간부를 추가하는 선에서 구성하기로 쉽게 결론이 났다.
즉 박충동 국무총리·김원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박동진 외무·김종환 내무·오탁근 법무·주영복 국방·이규호 문교·이광표 문공장관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희성 계엄사령관·유병현 합참의장·이희성 육군참모총장·김종곤 해군참모총장·윤자중 공군참모총장·전두환 보안 사령관 등 16직책에 14명이었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중복되었기 때문이다. 임명직 10명은 전두환 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보위 설치안 결재를 받을 때 말한 대로 군인 중심으로 구성하되 최 대통령의 의사를 먼저 묻기로 했다. 그 결과 최 대통령으로부터 김경원 대통령 외교 특보의 이름과 함께 나머지는 군인들 중에서 알아서 지명하라는 통고가 왔다.
3장군과 보안사 참모들은 숙의 끝에 백석주 한미연합사부사령관 (대장) 진종채 2군사령관 (중장) 유학성 군사령관(중장) 윤성민 군사령관(중장) 차규헌 육사 교장 (중장) 김정호 해군참모차장 (중장) 노태우 수경 사령관 (소장) 정호용 특전 사령관 (소장)에다 김경원씨를 포함해 10명의 임명직 위원을 확정했다.
이중 백석주·진종채 장군은 12·12를 적극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10·26사건과 관련, 정승화 참모총장의 태도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이며 12·12당시 육군참모차장이었던 윤계민 장군은 일단 반대편에 섰었으나 12·12가 성공한 바로 그 다음날 전두환 장군을 찾아와 협조를 다짐했던 인물이었다. 김정호 장군은 해병대를 대표해서 뽑혔다.
그러나 형식상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 이들 24명의 국보위원들 중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차규헌 장군 등 6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쉽게 말해 들러리였다. 왜냐하면 국보위가 발족해 5개월간 활동하는 동안 국보위원 전체회의는 단 두번 밖에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당연직 위원이었던 모씨는『겉모양은 민간과 군이 협조해서 거창한 일을 하는 기구로 되어있었지만 내막적으로는 l2· 12주도 세력이 정권인수를 위해 본격적인 작업을 하면서 최규하 정권을 얼굴로 활용한데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기구가 교묘한 대군 협조 기구지만 실제는 군사 평의회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데 대해 12·12세력들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유학성씨는 『5·17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으로써 군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고 말았다』며 『남은 절차는 국민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동기와 필요에 따라 주도 세력들은 국보위를 2중 구조로 조직·운영할 태세를 갖추었다. 즉 국보위의 얼굴은 최규하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대통령 자문 기구로 내세우고 실권은 전두환 장군 및 군부가 갖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 국보위 상임위 구성이었다. 전 장군의 군부 세력은 국보 위원 보다 상임위원 인선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상임 위원 명단이 국보위 발족 발표 닷새 뒤인 6월5일에야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때 그들은 매사를 치밀한 계획 하에 추진할 만큼 진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형국이었다.
실무 간사 격인 권정달 정보 처장은 볼펜으로 쓴 기구 편성표를 놓고 수시로 지웠다 써넣었다 했으며 보안사 참모들과 신 군부의 핵심 세력은 연줄 연줄로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아다녔다.
준비 미비로 국보위와 상임위의 동시 출범이 도저히 어렵게 되자 전두환 장군은 5월31일 국보위 설치를 먼저 발표하기로 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전 장군은 아울러 첫 회의는 청와대에서 해줄 것과 첫 회의에서 대통령이 간곡한 유시를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국민들이 국보위 발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느끼게끔 하는 가장 큰 명분을 광주 사태에서 찾기로 했다.

<국민 지지에 온 신경>
국보위 설치 발표와 계엄사의 「광주 사태로 1백70명 사망」 발표가 같은 날 (5월3l일) 나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부 당국은 5월l8일 광주에서 대학생과 진압군인 간의 층돌로 시작된 광주 사태를 계엄 하의 언론 검열 권을 발동, 당국의 발표 외에는 일체 보도하지 못하게 했었다. 이로 인해 것 보도가 나간 것은 5월21일이었으며 그나마 신문의 경우 1면에 「3단」크기 이상은 싣지 못하게 해 각 신문들이 l면 톱 자리에 컷도 못 달고 3단 활자 제목을 붙여내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발표 내용도 18일부터 광주에서 학생·시민들이 소요를 일으켜 충돌하는 바람에 민간인 1명, 군경 5명이 죽었으며 지역 감정을 유발하는 악성 유언비어가 퍼지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당일 신문에는 3단 크기의 광주 사태 보도 옆에 「소요 사태에 책임을 진 신현확 내각 일괄 사표」가 시커멓게 보도돼 사태의 심각성은 알만했다.
아뭏든 국보위 설치를 발표하면서 정부 당국은 『지난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 이후 야기된 정치적·사회적 불안, 금년 봄부터 악화되었던 학생 소요와 노사 분규, 그리고 국기를 위태롭게 했던 광주 사태 등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여 국가 보위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계엄 당국과 행정부간의 긴밀한 협조로 조속한 위기 극복과 안정 기반 구축을 위해 설치되었다』고 공식 입장을 정리했다.
또 최규하 대통령은 이날 첫 회의 유시에서 『근래 사회 일각에서는 시국의 중대성을 외면한 채 사회 불안과 혼란을 야기하는 언동을 일삼는가 하면 현실 정치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학생들의 시위가 점차 격화되어 마침내 공공의 안녕 질서를 파괴하고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집단적인 가두 시위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광주 사태는 그 원인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국법 질서를 교란하고 국기마저 위태롭게 할 위험성을 내포한 중대 사태였다』고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의 관심은 최 대통령이나 정부 당국의 설명보다 국보위 상임 위원장에 임명된 전두환 보안 사령관 겸 중정부장서리의 전면 등장에 쏠려 있었다. 더우기 이틀 뒤인 6월2일 전 장군이 갑자기 중정부장서리를 사퇴하고 국보위 상임 위원장과 보안 사령관직만 맡는다는 발표가 나와 궁금증은 더해갔다.
그로부터 또 사흘 뒤인 6월5일 정부는 상임위원 3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사복을 임은 전두환 상임 위원장이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국보위 현판식을 한 뒤 박충훈 국무총리와 악수하는 장면의 사진을 각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힘의 중심이 최 대통령에서 전위원장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면이었으며, 실제 이날을 기점으로 국보위 상임위는 사실상 내각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상임위는 법적으로 대통령 자문 기구의 하부 기관에 지나지 않으면서 내각의 권능을 수행해야 하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13개 분과위를 두고 분과 위원장을 현역 군인과 관련 부처의 차관보 또는 기획 관리 실장으로 반반씩 임명했다. 중요한 개혁 업무는 군인들이 직접 맡고 각 부처의 일상 업무는 각 분과 위원장들을 연락 책으로 활용해 통제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천거 명단 「3장군」 검토>
상임위원 30명은 다음과 같았다.
◇당연직 (14명·분과 위원장)=△사무처장 정관용 (중앙 공무원 교육원 부원장) △운영 이기백 (육군 소장) △법사 문상익 (대검 검사) △외무 노재원 (외무부 기획 관리 실장) △내무 이광로 (육군 소장) △경제 과학 김재익 (경제 기획원 기획 국장) △재무 심유선 (육군 소장) △문공 오자복 (육군 소장) △농수산 김주호 (농수산부 식산 차관보) △보사 조영길 (해군 준장) △교체 이우재 (육군 소장) △건설 이규효 (건설부 기획 관리 실장) △상공 금진호 (상공부 기획 관리 실장) △사회 정화 김만기 (중정 감찰 실장)
◇임명식 (16명)=이희근 (공군 중장) 신현수 (육군 중장) 차규헌 (육군 중장) 정원민 (해군 중장) 강영식 (육군 중장) 박노영 (육군 중장) 김윤호 (육군 중장) 권영각 (육군 소장) 김홍한 (육군 소장) 노태우 (육군 소장) 정호용 (육군 소장) 김인기 (공군 소장) 안치순 (대통령 정무 비서관) 민해영 (대통령 경제 비서관) 최재호 (대통령 민원 비서관·작고) 신현수 (대통령 사정 비서관)
국보 위원과 상임위원을 겸임하고 있는 사람은 전두환·노태우·정호용·차규헌 장군 등 4명뿐이었다. 이중 차 장군은 12·12세력과 친한 선배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보위 발족 당일 해외 여행 중이었고 핵심은 바로 「3장군」이었다. 3장군은 바로 탄생할 새 정권의 기둥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군 출신 상임 위원들은 주로 보안사 참모들을 중심으로 한 「대령」들이 천거한 명단을 「3장군」이 검토·수락하는 형식으로 인선을 했다.
이기백 운영 위원장은 11기생 중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문이 나 상임위의 대들보 격으로 추천됐으며 이광로 내무위원장은 책임감이 강한 것으로, 오자복 문공위원장은 간부 후보생 출신 중 가장 우수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또 조영길 보사위원장은 해군에서「인재」로 추천 받았으며 김만기 정화위원장은 군에서 청렴하고 고지식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이우재 교체 위원장은 통신 장교로서의 전문성이 평가되었다. 12·l2세력의 안목에서 군내에서 똑똑하고 대표성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골랐다는 것이다.
관료 출신은 거의 강제 「차출」 형식이었는데 한 사람도 거절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보안사 참모들의 증언이며 이들은 대부분 제5공화국에서 우대 받은 편이었다. 김재익 경과 위원장은 기획원에서의 직급 (국장)이 낮아 처음엔 분과위원 정도로 기용하려했다가 적임자를 찾지 못해 「위원장 서리」를 시켰는데 능력과 실력이 탁월해 곧 전두환 상임 위원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경제 참모가 되었으나 아웅산에서 참변을 당했다.
그러나 국보위의 발족이 꼭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최규하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 및 일부 각료들은 시국의 난해성과 위기 관리를 군에 맡기지 않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국보위 설치에 동의했지만 내심 신 군부의 발호에 불만과 저항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좌석 배열로 실랑이도>
이를 엿 볼 수 있는 한가지 사례가 5월3l일 첫 청와대 회의 직전에 벌어졌다. 국보위 측은 첫 회의의 좌석 배열을 최 대통령이 한 가운데 앉고 한쪽 줄 맨 앞은 박충훈 국무총리, 그 맞은 편에 전두환 상임 위원장이 앉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안 된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는 『어떻게 국무총리하고 육군 중장이 대등하게 앉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국보위 측은 즉각 군 특유의 기질로 반격했다. 『누가 그러더냐』고 따졌고 『최광수 비서실장이 시켰다』는 말이 들려와 한때 보안사에서 최 실장을 좋지 않게 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의자 배열은 다음 번 회의 때부터는 결국 국보위 측 요구대로 되었다. 한 줄은 총리 이하 각료가, 맞은편 한 줄에는 군인들이 앉았다.
또 이기백 운영위원장이 전 상임위원장 명의로 이희성 참모총장에게 보내는 공문에 「…참고하기 바람」이라고 썼다가 이 총장으로부터 호된 실책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뭏든 이런 와중에 상임위까지 구성한 보안사는 다시 상임위의 각 분과위원 인선에 착수했다. 군부는 각 상임위의 분과위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정권인수 및 대 국민설득 작업을 펴기로 원칙을 정함에 따라 분과위원은 우선 믿을 수 있는 민간인, 즉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고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민간인 스카우트는 보안사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대령 급들이 나서서 했다. 20년 이상 군대 생활을 한 그들이 평소 민간인들과 두루 교분을 맺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손을 뻗칠 수 있는 쉬운 상대는 육사 교수와 육사 출신의 각계 인사, 아니면 중·고교 동창을 통한 학연·지연을 찾는 것이었다. 또 권력의 향배가 정해지는 기미를 보이자 각계의 여러 사람들이 연줄을 찾아 이들에게 접근해 갔다. 갑자기 영향력 있는 인사가 생겨나고 ○○고교 인맥이 화제 거리가 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특별 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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