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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뭔가 알고 떠나자|김성호 <중앙일보 출판기획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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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세계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 환율이 계속 떨어지자 유럽인과 일본인들이 신이 났다. 강세의 자국 통화로 달러를 듬뿍 바꾸어 미국 여행길에 나서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 사람들의 미국 여행 열은 놀랍다. 작년 한해 동안 미국 땅을 밟은 1천50만명의 여행객 가운데 4백70만명이 유럽 사람인데 이 숫자는 86년보다 26%가 늘어난 것이라고 외지는 전한다.
올해는 이 숫자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라니 로마의 식당 웨이터와 버스 운전사들이 캘리포니아로 바캉스를 떠나겠다는 말이 실감나게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미국 여행객이 작년 한해 57%나 늘어났는데 노동자 계층이 점차 많아진다고 한다.
미국을 여행하는 유럽 대륙인들의 80% 가량이 토막 영어를 밑천으로 혼자 떠나고 나머지는 패키지 투어를 한다.
여행 스타일도 예전과 다르다. 호텔에 머물며 나이애가라 같은 관광 명소만 보는게 아니다. 캠퍼트레일러를 세내어 인디언 유보지나 광활한 목장을 둘러본다.
아직도 남아 있는 서부 개척사의 흔적을 이들은 좋아한다. 로디오 경기에 매료되는 유럽인들도 많다.
미국 여행이 활발해 진 것은 달러 가치의 하락 때문만이 아니다. 항공사들이 다투어 항공 요금을 내리고 있는 것도 큰 원인이다. 런던에서 플로리다로 가는 비행기 요금은 런던∼아테네간과 똑같다. 거리는 3배 이상 먼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구미 서점 가에서 18, 19세기 때의 여행기·모험담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1백년 전의 아프리카 탐험기나 서부 개척 시대의 여행기가 베스트 셀러로 등장한다는 얘기다.
해외 여행 붐은 멀지않아 한국에도 찾아올 것이다. 원화가 어엿하게 달러에 대해 강세를 보이고 있고 무역 흑자가 착실하게 쌓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정부도 89년부터 해외 여행을 전면 자유화한다니 보통 사람에게도 붕정만리가 그림의 떡만은 아닌 시절이 올 것 같다.
아직도 외채가 3백억 달러가 넘고 또 땀흘려 번 돈을 허비하는 것 같아 꺼림칙한 면이 있지만 해외 문물에 직접 부딪쳐가면서 견문과 지식을 높이고 나라의 미래를 가늠해 보는 기회를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촌 시대에 우물 안 개구리는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도 여행 문화의 정립을 서둘러야겠다는 것이다. 60년대 일본 사람들은 깃발 관광단을 만들어 외국을 누볐다. 결국 본 것은 안내자의 깃발 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지만 짧은 여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곳을 보게 하자는 편의주의의 산물일 것이다.
여행길이 편안 하자면 출입국 수속에서부터 수송 편·숙박·안내 등을 전담하는 일체의 관광·여행업이 현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정하는 일이다. 무턱대고 루브르 박물관이나 베르사유궁을 찾기보다는 프랑스 문화나 유럽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떠나면 여행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입시 공부 때문에 국·영·수에 밀리는 세계사와 지리 교육의 중요성도 다시 평가할 일이다.
남들처럼 판에 박힌 관광 여행에 지쳐 탐험에 가까운 여행을 하지는 못해도 좋은 기회를 한껏 활용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여행 문화 정립의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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