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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 바구니'에 앞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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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랑은 우리를 가슴 떨리게 하고, 갈망하게 하고, 꿈꾸게 한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대뇌에서는 화학작용이 시작돼 만족이나 기쁨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뇌 화학물질이 솟아난다. 그리하여 갑자기 망치에 맞은 것같이 멍하고, 평범한 쾌락을 넘어 강렬하며 신비스럽고 압도적인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감은 감기와 같은 신체적 질병뿐 아니라 불안.외로움.우울 같은 심리적 장애까지 완화 해 준다. 계속되는 기분 좋은 상태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고 성취 욕구를 강화시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한다. 그 예로 사랑의 위대한 열매들을 우리는 많은 예술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가장 성공적인 삶이란, 사랑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삶이라 했다.

이렇게 사랑이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개인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꾸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감흥으로 이끌었던 사랑은 점차 가벼운 신체적 끌림과 성적 만족으로 기울고 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은 건강한 후손을 많이 남기려 하는 본능이 있어 더 젊고 매력적인 상대에게 끌리게 돼 있다. 최근 한 심리학 실험에 따르면 대학생들에게 여러 사람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고, 이 중 가장 매력적인 얼굴과 매력적이지 않은 얼굴을 뽑도록 했다. 이렇게 뽑힌 두 사진을 동시에 아기에게 보여주고 각기 응시 시간을 측정한 결과 생후 3개월 된 아기도 매력이지 않은 얼굴보다 매력적인 얼굴을 훨씬 더 오랫동안 응시했고, 심지어 방긋 웃기까지 했다. 이렇게 신체적인 매력에 끌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끌림으로 시작된 사랑의 열정은 대뇌에서 암페타민.코카인 등의 마약 중독과 유사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의존과 갈망이 중독의 징후이듯이 신체적 끌림에 의한 사랑은 상대에게 성적 욕구의 감정을 격발시키고, 강한 의존과 집착으로 연결돼 성적 본능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상실하게 해 한 개인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극단적으로는 데이트 강간이나 부부 강간과 같은 성폭력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왜곡된 사랑은 잘못된 성문화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잘못된 성문화의 뿌리를 더 깊게 하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랑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사랑은 열정(passion).친밀감(intimacy).책임(commitment)의 세 축으로 돼 있다. 사랑은 뜨거운 신체적 끌림의 열정뿐 아니라 상대와 대화하고 공감함으로써 갖게 되는 이해와 배려, 정서적 지지, 친밀감과 같은 따뜻한 요소를 필요로 한다. 또한 그 사랑을 장기적으로 완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방해하는 여러 유혹을 물리치는 책임감이나 의지와 같은 사랑의 차가운 요소도 필요하다. 이렇듯 완전한 사랑에는 뜨거운(hot) '열정', 따뜻한(warm) '정서적 친밀감', 그리고 차가운(cool) '책임과 결심'이 공존해야 한다. 이 세 요소를 고르게 갖추지 못할 경우 열정만 있는 '도취성 사랑', 단지 책임만 있는 '공허한 사랑' 등 불완전하고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의 형태가 된다. 친구 사이 같은 '우애적 사랑'도 열정이 빠진 불완전한 사랑이며, 영화나 소설 속의 사랑처럼 우리가 꿈꾸는 '낭만적 사랑' 또한 책임은 없이 친밀감과 열정만으로 이뤄진 미성숙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화이트데이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이 아름답고 완전하길 바란다. 사탕 바구니를 주고받기에 앞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뜨거움과 따뜻함과 차가움이 모두 갖춰져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