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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도 사회도 ‘어디쯤 가고 있는지’ 숙고할 공간 필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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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호 22면

[빠른 삶, 느린 생각] 마음의 지도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지난해 11월에 포르투갈에서 개최되었던 과학기술회의에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교수의 인공지능(AI)에 관한 발언이 여러 매체에서 크게 보도된 일이 있었다. 그중에 크게 매스컴을 탄 것은 지금처럼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여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또는 그것을 능가하는 기계가 개발된다면 불원간에 그러한 AI가 인간을 대체하거나 파괴할 것이고, 그에 대한 해결은 인간이 다른 위성으로 이민해가는 도리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의 제안이 정당한 것인지, 또는 그가 말하는 우주 이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제트기를 타고 이동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늘과 땅을 보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삶의 방향을 맡긴 채 #예측 불가 ‘고약한 문제’와 직면 #자신과 주변 돌아볼 여유 찾아야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문제의 하나는 인간 자신이 AI 로봇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AI가 호킹 교수가 걱정하는 만큼 발달한다는 것은 인간의 그러한 지능 개발을 환영한다는 말인데, 인간의 기술에 대한 도취가 이미 인간 자체를 그러한 비인간의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교통과 통신, 정보 유통의 가속화, 소비재 유통의 세계화, 일상적 삶의 편의들의 한없는 신장, 이러한 것들을 무조건 환영하고 이것을 즐기는 것이 오늘의 인간이다. 인간 자체가 그 신체에 AI의 여러 장치를 장착하여 진짜 로봇으로 변신하는 날도 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계화되고 기능화되는 자신과 환경은 인간에게 그대로 즐겁기만 한 일일까?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뻗혀나갈 것인가? 인간이 원하는 것 가운데 핵심적인 욕망은 본래 자연에서 타고 난 것이다. 식욕이나 성욕은 물론이지만, AI를 만들기에 이른 과학적, 기술적 호기심도 그렇다. 도시 사람들이 등산을 하고 숲과 화초를 찾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자연 친화도 인간의 숨은 본능인지 모른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도 의미가 있다

헝가리계 독일 작가 외돈 폰 호르바트는 비행기가 처음 뜨기 시작하였을 때 ‘밧줄 풍선, 비행선, 비행기’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우화를 쓴 일이 있다. 밧줄에 매여 있는 커다란 풍선을 탄 사람은 이 풍선이 땅에 묶여 있다는 것을 느끼고, 묶어 놓은 밧줄이 끊어지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높이 올라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발 아래의 작은 땅을 내려다 보게 된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위로 하늘을 보는 것을 시원하게 느낀다. 비행선을 타는 사람은 비행선 아래로 펼쳐지는 여러 지역을 보면서 즐긴다. 그리고 비행선 아래로 지나가는 땅들을 보는 사이에 두 눈으로 하늘을 보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비행기를 탄 사람은 비행기의 엔진에 신경을 쓰느라고 땅도 하늘도 보지 못한다. 엔진 고장으로 언제 추락할지 걱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화의 요지는 기계가 발달할수록 기계가 열어 놓는 체험은 늘지만, 사람의 체험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빈약해진다는 것이다.

엔진에만 신경을 쓰게 하는 비행기는 1930년대 초창기의 비행기이고, 요즘의 비행기는 아니다. 요즘의 여객기를 타는 사람은 하늘을 배경으로 힘차게 압축 공기를 밀어내는 비행기의 엔진에 무관심할 것이고, 앉은 자리가 적절하면, 더러 땅을 내려 보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기는 하겠지만, 대체로는 지상에 있을 때나 다름없이 의자에 앉아 비행기 실내를 돌아보고 신문을 읽고 지루한 시간에 대비하여 준비해 간 책을 보고 스튜어디스가 가져다주는 땅콩을 먹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이렇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비행 시간은 공허한 장소에서 보내는 공허한 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될 수 있으면 비행시간을 축소해주는 비행기를 선호한다.

제트기가 등장하기 전 프로펠러 비행기로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데에는 30여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루하고 피곤하기는 하였지만 비행기는 주유를 위하여 도쿄, 미드웨이 또는 괌, 하와이에 머물고 여객은 그 나름으로 바닷가도 거닐어 보고, 항공사에서 안내하는 이국(異國)의 식당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대접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버스나 기차를 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전쟁 직후 기차를 타고 고향 전라도에서 서울로 가까이 오는 것은 적어도 평택·오산·영등포·용산 등 도시의 이름이라도 익히는 일이었다. 땅을 옮겨 간다는 것을 가장 실감나게 느낀 것은 어느 해 홍수로 철도가 유실되어 대전 근처까지 기차로 와서 걸어서 그 남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차로 갈아 탄 일이 있었을 때였다. 이제 고속 열차가 발달해 서울에서 강릉까지 가는 데에 한 시간 남짓 걸린다고 하는데, 서울 사람이 강릉으로 가는 것은 동해안이나 설악산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을 텐데 서울~강릉 사이의 중간 여러 지대에도 산수가 수려한 곳이 많지만, 그것을 보고 또는 그 길을 걸어보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까? 마당이 있고, 마루가 있고, 안방이 있고 하는 옛 집에서 방물장사가 물건을 팔러 왔다가 저녁을 함께 먹고 잠자리를 얻어 자고 떠났다는 추억담을 최근에 읽었다. 사회적 불신도가 알려진 만큼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밀폐구조의 가옥에서 그러한 일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복고주의를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심리적 불안정,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가 커졌다고 하여도 그간의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지고, 삶이 많은 편의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다.

무작정 만들고, 나아가는 게 우리 현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알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삶의 도움이 되게 관리·조정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이라는 의견도 있다. 수많은 곳에서 하루 아침에 기업이 흥하고 망하고, 걷잡을 수 없게 부침하게 된 것이 오늘의 기업 사정이라고 한다. 부침이 심한 것은 변덕이 심한 소비 시장의 탓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산업 기술의 움직임과 방향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정보 전문가인 팀 오라일리 오라일리미디어 창업자는 어떤 발전이 있으나 그것이 가져오는 충격 효과를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경우를 기업 기획자들의 용어로 ‘고약한 문제’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많은 기업들이나 발명품들은 빠른 오름세와 내림세 사이에서 요동한다. 특히 AI와 로봇에 관계되는 상품과 사업들의 경우에 그렇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인 부작용도 그러하다. 운전사 없는 자동차가 보급되면 운전을 직업으로 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AI가 비행기를 날게 하고, 의사에게 즉석 자문을 하고, 신문 기사를 쓰고, 직장으로 가는 빠른 방법을 알려주고, 할 일의 과다에 따라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여 알리고, 이러한 일들이 널리 퍼지면, 즉 ‘고약한 문제들’이 널리 퍼지면 작업 계획들이 정상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까? 사람이 부리던 AI가 사람을 부리게 될 때, 그러한 작업 구조에 인간적이면서 합리적인 조직을 부과할 수 있을까?

수시로 아무데서나 빠른 속도의 변화가 일어나는 현실에는 심리적인 문제들, 심리적이면서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다시 오라일리 창업자의 생각을 빌리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그리고 기업이 버티어 나가는 데에는 ‘적절한 지도(地圖)’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에서 지도는 현재 머물고 있는 장소와 앞으로 갈 곳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삶의 계획의 도형(圖形)이다. 사업가에게도 그의 일에 맞는 지도가 있어야 한다. 기업의 현재 상황과 미래의 전망을 보여주는 사업의 지형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체계를 지니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정부의 경우도 그렇다. 오늘의 정부는 어떤 지도를 가지고 있는가? 적폐 청산 하나 하나의 뒤에는 국민이 짐작할 만한 지도가 있는 것일까?)

지도는 일상적 삶에서도 필수적이다. 복잡한 길거리에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편하게 되는 것은 집의 지도가 마음에 깊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집의 구조나 가구나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의 지도가 내 의식에, 또는 내 무의식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마음의 지도에 가외로 필요한 것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사람이 최소의 공간만을 필요로 한다면, 잠을 자는 집은 시체가 들어 갈만한 관(棺) 정도의 크기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보다는 큰 공간을 원한다.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쓸데없는 정보의 홍수에 익사할 정도가 되어있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일은 종교적 명상이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세의 삶에도 마음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삶에 안정을 주고, 내 삶과 내 주변의 사정에 대하여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여유를 만든다. 이것은 사회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에서도 공간, 명상과 숙고의 공간이 느껴져야 한다. 위에 말한 바 ‘고약한 문제들’은 오늘의 삶의 부작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일도양단의 척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물론 깊은 숙고의 공간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또 그것은 많은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의 지도가 있어서 존재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그러한 지도, 그리고 그 한 구석에 숙고의 공간이 있는 것일까? 무작정 만들고, 나아가고, 부수고, ‘고약한 문제’에 밀리고 하는 것이 우리 형편이 아닐까? 해가 바뀜에 따라, 지도와 공간이 보이기 시작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심미적 이성의 탐구』『자유와 인간적인 삶』『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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