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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박희순 "20년지기 장준환 감독, '1987' 의외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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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을 가장한 폭력 그 한 가운데서"

‘1987’ 박희순 / 사진=전소윤(STUDIO 706)

‘1987’ 박희순 / 사진=전소윤(STUDIO 706)

 “살려내세요.” 영화 '1987'(12월 27일 개봉, 장준환 감독)에서 고문하던 박종철(여진구)이 의식을 잃자 남영동 대공분실의 조 반장(박희순)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폭력이 몸에 밴 듯 강해 보이는 그의 눈이 흔들린다. 박희순(47)은 고민이 많았다. 명백한 가해자, 조 반장의 내면을 얼마만큼 보여줘야 할까. 애국을 가장한 폭력과 죄책감 사이. 가혹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 그에게도 딜레마의 순간은 찾아온다. 박희순은 어떤 얼굴로 그를 그리려 했을까.



━처음부터 조 반장 역할로 출연 제의를 받았나. 
“맞다. 그래서 다른 역할을 달라고 했지. 우리 나라 민주화의 시발점을 그린 의미 있는 작품이니까. 장준환 감독에게 ‘나도 역사의 변화에 큰 힘을 싣는 소시민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20년 지기라 그런지 안 먹히더라. 만만해서 부려먹은 것 같다(웃음). 그래도 ‘1987’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인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다큐멘터리 같으면서도 극적인 게 좋았다. 의미와 영화적 완성도 모두를 가져갈 영화 같더라.”

━놀랐다. 20년 지기라니. 
“장 감독의 첫 단편 ‘2001 이매진’(1994)의 주연을 맡았다. 나도 영화에 출연한 건 처음이었다. 나이도 동갑이고 첫 영화를 함께 했으니 금세 친구가 됐다. 처음 장 감독이 ‘1987’ 시나리오를 가져왔을 때 되게 의외였다. 이 친구는 기발한 상상력이 주가 되는 영화를 추구해왔고, 나도 그런 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10년에 한 작품씩 하더니, 난데없이 이렇게 묵직하고 시대성 있는 영화를 들고 왔더라. 찬찬히 읽어보니 행간에 녹아든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1987'

'1987'

━조 반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대표 가해자로 수감된다. 수감된 후에야 자신의 행동과 처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는 용서할 수 없는 가해자다. 그럼에도 배우는 인물의 내면을 파악해야 하니 모티브가 된 인물인 조한경 경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는 상부에 복종하며, 이를 애국이라 믿은 자였다. 그래서 수감된 후 찾아온 박 처장의 명령을 거역하는 장면이 중요했다. ‘우리가 애국자입니까?’라고 소리 지를 때. 이 순간이 조 반장의 내면을 가장 잘 살린 장면이다.”

━관객에게 조 반장이 어떻게 보이길 바랐나.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조 반장이 이해되게 연기하는 게 옳을까, 고스란히 가해자로 보이는 게 옳을까. 장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조율해 나갔다. 장 감독은 조 반장이 분명한 가해자로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이 영화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올 테니까. 사실 시나리오엔 조 반장이 나체로 항문 검사를 받는 등 그 역시 국가 폭력에 시달리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조 반장이 불쌍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편집 과정에서 제법 덜어냈다고 하더라. 고생 많이 했었는데(웃음).”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대공분실 부분은 현장 분위기도 되게 무거웠다. 마치 ‘대부’ 시리즈(1972~1990,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를 찍는 느낌이랄까. 박 처장이라는 악의 근원이 보스처럼 존재하고, 조직원들은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른다. 대공분실은 범죄 집단보다 더 조직력이 강한 무서운 집단인 것이다. 특히 박 처장과 조 반장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이 단단하게 엮인 사이다. 그래서 조 반장이 느끼는 배신감도 대단하다.”

━심지어 조직원들은 박 처장에게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사극에나 나올 법한 말이지(웃음). 그런 말을 진지하게 내뱉을 정도면, 박 처장이 얼마나 권위적이었는지 한 눈에 보이지 않나. 극 중 조 반장은 이 말을 네다섯 번 정도 하는데, 감정이 모두 다르다. 그 결을 잘 살리려 했다.”

━김윤석 배우는 무서울 만큼 카리스마가 세지 않나.
“무섭지, 사실 평상시에도 좀 무섭다(웃음). 그런 선배한테 대드는 장면이니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커버스토리 ‘1987’ 김윤석&김태리&박희순&이희준 표지 사진 12월 27일 개봉하는 ‘1987’의 주연 배우 김윤석&김태리&박희순&이희준 사진=전소윤(STUDIO 706) 재사용시 매거진M팀에 문의

커버스토리 ‘1987’ 김윤석&김태리&박희순&이희준 표지 사진 12월 27일 개봉하는 ‘1987’의 주연 배우 김윤석&김태리&박희순&이희준 사진=전소윤(STUDIO 706) 재사용시 매거진M팀에 문의

━1987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당시 고3이었다. 88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을 때, 학교가 명동(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있었다. 명동 성당 근처는 발 디디기도 힘들 만큼 늘 시위 중이었다. 당시 ‘데모 하던 대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을 통해 접했지만, 연극에 빠져 있던 터라 시위엔 나가지 못했다. 당시의 깊은 내막을 알게 된 후 ‘내가 어떻게 그들을 애도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배우는 작품으로 말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작품에 참여하는 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내가 직접 SNS에 글을 써서 정치색을 보이는 건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다 한들 도움도 안 될 테니까.”

━주연급 배우들이 대거 참여한 작품이다. 다른 작품과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처음엔 각 인물의 비중이 비슷해 극의 집중도가 떨어질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한 배우가 극에서 사라져도, 그의 존재감은 계속 남아 있더라. ‘1987’은 그 힘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그래서 촬영장은 전쟁터 같았다. 각자 자신이 나오는 장면은 한정돼 있으니, 모두 목숨 걸고 촬영한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조우진이었다. 그는 박종철의 삼촌으로 두세 장면에만 출연했는데, 완전히 몰입돼 현장에서 하루 종일 울고 있더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심으로 ‘작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했다.”

‘1987’ 박희순 / 사진=전소윤(STUDIO 706)

‘1987’ 박희순 / 사진=전소윤(STUDIO 706)

━중요한 연기 원칙이 있다면.
“아무리 착한 사람도 화를 내거나 나쁜 생각을 할 때가 있듯이, 악랄한 인간도 어느 한구석은 진심일 때가 있다. 늘 인물의 진심이 나오는 순간이 언제일까 고민한다. 인간은 입체적이고 복잡하니까, 단선적으로 보이지 않으려 표현의 강약 등을 고심하는 편이다.”

━올해 magazine M의 표지에 세 번이나 등장한다. 2017년을 돌아보면.
“너무 내가 없이 산 것 같다. ‘남한산성’ 등 2017년에만 여섯 작품을 했다. 인간 박희순이 아닌, 그 작품 속 인물로 몇 달씩 살게 되니 ‘나는 누굴까?’ 라는 생각도 들고. 공허함과 뿌듯함이 교차한다.”

━연말 계획은.
“촬영 중인 ‘마녀’(박훈정 감독)를 마무리하고 ‘1987’ 홍보에 매진해야지. 회식도 하고. 돌이켜 보면 무대인사 하면서 동료 배우들과 더 친해지는 것 같다. ‘브이아이피’(8월 23일 개봉, 박훈정 감독) 때도 홍보 막바지에 장동건과 겨우 말을 놨다(웃음).”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전소윤 (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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