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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경험이 키운 음모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2호 31면

외국인의 눈

지난해 이맘때 이 코너에 ‘터키-만우절 잘못된 만남’이라는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터키를 비롯한 중동에서 음모론이 쉽게 통하는 이유가 무지(無知)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후에 언론인, 학자들과 ‘중동의 음모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다시 한번 이 주제가 불거져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가 얼마 전 미국 경매에서 비밀리에 예수의 초상화를 거액에 낙찰받으면서다. 빈 살만 왕자는 최근 와하비즘 원리주의 이슬람 학자들과 전쟁을 선포하면서 앞으로 온건 이슬람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혀 이슬람 보수파의 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기독교도일 수 있다는 음모론이 제기된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무지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의 중동 전문가들은 무지로만 설명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주변에도 교육 수준이 높지만 음모론 위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 내린 답은 중동 사람들의 ‘배신의 경험’이었다.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차 대전 당시 아랍지역은 오스만 제국에 종교적인 이유로 충성하고 있었다. 중동 석유에 욕심을 내던 영국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런스’로 유명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를 앞세워 손을 뻗쳤다. 영국 정보장교 로런스는 자신을 무슬림으로 소개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 민병군을 동원해 중동 지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준 영국엔 대아랍 왕국이 또 하나의 위협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이 지역을 다시 이라크, 요르단, 사우디로 분리했다. 이는 중동인들이 배신으로 여길 만한 일이다.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둔 이유 중 하나는 정보망이었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의 사위는 이스라엘 간첩이었다. 그는 이집트의 모든 작전을 사전에 이스라엘에 알려 주었다. 그러니 배신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중동에서 이러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중동 사람들은 음모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이 같은 무지와 배신의 경험이 중동에서 음모론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본다.

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전 터키 지한통신 한국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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