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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공장 100곳의 야심작 ‘변두리 썰매’ 타는 ‘쿨 볼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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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본 중소기업이 만든 썰매로 평창올림픽에 도전하는 자메이카 여자 대표팀 빅토리언(오른쪽)과 러셀. 이들은 자메이카 봅슬레이 여자팀으론 사상 처음 겨울올림픽 출전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자메이카봅슬레이협회]

일본 중소기업이 만든 썰매로 평창올림픽에 도전하는 자메이카 여자 대표팀 빅토리언(오른쪽)과 러셀. 이들은 자메이카 봅슬레이 여자팀으론 사상 처음 겨울올림픽 출전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자메이카봅슬레이협회]

“관중 여러분, ‘쿨 볼트(Cool Bolt)’를 소개합니다.”

영화 ‘쿨 러닝’의 여자 봅슬레이팀 #일본 중소기업들 합작품 무기로 #BMW·페라리가 만든 제품과 경쟁 #동일본대지진 극복 위해 만든 썰매 #일본 대표팀 외면, 자메이카와 인연 #무상 제작 … 지난달 국제대회서 2위

지난 10일 독일 빈터베르크에서 열린 봅슬레이 4차 월드컵. 장내 아나운서가 처음으로 봅슬레이 월드컵에 출전하는 자메이카 선수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자메이카의 육상 스타 우사인 볼트(31)가 나타나나 싶었지만 정작 봅슬레이 슬라이딩 트랙에는 두 명의 여자 선수가 등장했다. 이들은 23개 팀 중 7위를 차지했다. 자메이카 봅슬레이의 유일한 여자 대표팀, 재즈먼 펜레이터-빅토리언(32)과 캐리 러셀(27)의 성공적인 월드컵 데뷔전이었다.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이 겨울올림픽에 도전한 건 1988년 캘거리 대회가 처음이었다. 내년 평창올림픽은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이 겨울올림픽에 도전한 지 30년이 되는 무대다.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의 스토리는 1993년 영화(‘쿨 러닝’)로도 만들어졌다. 내년 평창올림픽에는 영화 제목과 자메이카의 육상 스타 우사인 볼트의 이름을 합친 ‘쿨 볼트’팀이 출전할 예정이다.

평창이 겨울올림픽 도전 30주년 무대

지난 1월 북아메리카컵에서 사상 처음 동메달을 딴 빅토리언(왼쪽)과 러셀. [사진 자메이카봅슬레이협회]

지난 1월 북아메리카컵에서 사상 처음 동메달을 딴 빅토리언(왼쪽)과 러셀. [사진 자메이카봅슬레이협회]

‘쿨 볼트’팀은 미국 대표로 활약하다 2015년 아버지 국적을 따라 자메이카로 귀화한 빅토리언과 2013년 세계육상선수권 400m 계주에서 자메이카 여자 대표로 금메달을 땄던 러셀의 조합으로 이뤄졌다.

이들의 도전이 더욱 빛나는 건 ‘특별한 썰매’ 때문이다. 내년 평창올림픽에서 이들은 100여 개의 일본 중소기업이 힘을 합쳐 제작한 썰매를 탄다. 일명 ‘시타마치(下町·변두리) 썰매’다. BMW, 페라리, 맥라렌 같은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들의 기술 경연장인 봅슬레이에 동네 공장에서 만든 ‘변두리 썰매’를 가지고, 그것도 올림픽 무대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봅슬레이는 ‘얼음 위의 포뮬러 원(F1)’으로 불린다. 봅슬레이 선수들이 사용하는 썰매는 ‘첨단과학의 결정체’다. 봅슬레이 썰매를 제작할 때는 속도나 공기역학 등을 고려해야 한다. 자동차 제조와 비슷한 점이 많다. 독일 BMW는 2014년 소치올림픽에 참가한 미국팀 썰매 제작에 2400만 달러(약 262억원)를 들였다.

지난해 10월 직접 만든 썰매를 앞에 두고 기뻐하는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 팀원들. 자메이카 봅슬레이 대표팀은 이 썰매를 타고 내년 평창올림픽에 출전할 예정이다.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페이스북]

지난해 10월 직접 만든 썰매를 앞에 두고 기뻐하는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 팀원들. 자메이카 봅슬레이 대표팀은 이 썰매를 타고 내년 평창올림픽에 출전할 예정이다.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페이스북]

첨단기술이 필수적인 썰매 제작에 일본 중소기업들이 겁 없이 덤벼든 건 2011년. 당시 일본 도쿄 오타(大田)구의 30여 중소기업은 일본 봅슬레이 대표팀을 위해 직접 썰매를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뭔가 해보자’며 시작한 프로젝트가 바로 썰매 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선수들은 외국산 썰매를 타고 경기를 치렀다. 호소가이 준이치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 대표는 “일본산 봅슬레이를 만들어 겨울올림픽에서 일본의 기술력을 세계에 보여주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썰매 부품을 해체해 분석하는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팀.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홈페이지]

썰매 부품을 해체해 분석하는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팀.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홈페이지]

2012년 선수 맞춤형 썰매를 만드는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팀.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홈페이지]

2012년 선수 맞춤형 썰매를 만드는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팀.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홈페이지]

그러나 난관도 많았다. 우선 봅슬레이를 제작할 기술이 뭔지도 몰랐다. 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제작한 썰매를 해체한 뒤 꼼꼼히 분석했다. 썰매에 필요한 부품을 각 회사가 분담해 제작한 뒤 이를 결합했다. 이를 위해 100여 개 회사가 달라붙었다. 성과도 있었다. 2012년 12월, 이 썰매를 타고 경기에 나선 팀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하면서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끝내 일본 대표팀은 이 썰매를 외면했다. 프로젝트도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썰매 제작 과정, 다큐·드라마로 인기 끌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때 이들의 도전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고, 이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 ‘변두리 로켓’이 2015년 인기를 끌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프로젝트팀은 자신감을 갖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때 ‘변두리 썰매’를 주목한 게 자메이카였다. 때마침 자메이카는 갓 결성한 여자 대표팀을 위한 썰매를 물색 중이었다.

지난해 1월 일본 나가노에서 '변두리 썰매' 시험 주행을 하는 자메이카 여자 봅슬레이팀.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홈페이지]

지난해 1월 일본 나가노에서 '변두리 썰매' 시험 주행을 하는 자메이카 여자 봅슬레이팀. [사진 변두리 썰매 프로젝트팀 홈페이지]

프로젝트팀은 지난해 7월 자메이카 대표팀에 썰매를 무상으로 제작해 주기로 약속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져 썰매 성능은 점점 좋아졌다. 빅토리언과 러셀은 ‘변두리 썰매’를 타고 지난달 북아메리카컵 1차 대회에서 2위까지 올랐다. 봅슬레이 선수 경력 11년 차인 빅토리언은 “자동차회사에서 제작한 썰매보다 우리 썰매가 낫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4차 월드컵에선 독일 물류센터의 파업 문제로 '변두리 썰매'를 들여오지 못하고 라트비아산 썰매를 대신 탔다. 그러나 16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열리는 5차 월드컵에서 다시 ‘변두리 썰매’를 타고 출전할 예정이다. 빅토리언은 “평창올림픽에서 자메이카팀이 변두리 썰매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강원도 강릉 안목항에 설치된 오륜기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러셀(붉은 원)과 빅토리언(초록 원). [사진 자메이카봅슬레이협회]

지난 10월 강원도 강릉 안목항에 설치된 오륜기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러셀(붉은 원)과 빅토리언(초록 원). [사진 자메이카봅슬레이협회]

◆국산-해외 썰매 고민 중인 한국=한국 봅슬레이는 원윤종(강원도청)-서영우(경기연맹) 등 남자 2인승에서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노린다. 2014년부터는 현대자동차가 대표팀이 평창올림픽에서 탈 썰매를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평창올림픽에서 탈 썰매를 정하지 못했다. 2015~2016 시즌에 종합 우승했던 라트비아산 썰매와 저울질 중이다. 대표팀은 다음달 중순, 평창올림픽에서 탈 썰매를 확정할 계획이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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