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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마리는 악을 선으로 갚는데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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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화 위는 8일 하오 광주사태관련자들의 증언청취를 모두 마쳤다. 그 동안 광주 측에서 이광영·배근수·김성수·김내향·박석련·전계량·전옥주씨 등 7명, 당국 측에서 정시채·소준열·한도희·김용상·구용상·이광노 씨 등 6명 모두 13명이 나와 증언했다. 민화 위는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노태우 차기대통령에게 광주사태해결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한다. 다음은 8일의 참고인 증언과 토론요지-.
▲전계량 씨 (5·18광주의거유족회장)=5·18 광주 민중항쟁이야말로 민중 스스로의 생존권과 자주권 쟁취를 위한 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이었으며 민주화와 민족통일로 가는 민족발전의 대 전환점이었다는 점에서 지역 감정이나 과거의 우발사태, 혹은 폭도들이 일으킨 폭력사태 등으로 매도될 수 없는 민족사의 한 획이었다.
민화 위는 광주학살에 대한 원천적 치유방안을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모색할 수 없다고 본다.
첫째, 민화위는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구성한 기구로서 광주학살로 등장한 민정당의 한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아울러 차기정권의 정통성 구축을 위해 구성된 기구이기 때문에 진상규명이나 해결방안제시에 한계점이 있다.
둘째, 국가적 차원에서 법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보다는 선심에서 비롯된 양 선전되고 있으며 민화 위 자체가 임시 자문기구에 불과해 설령 해결방안이 모색된다해도 차기정부에 모두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다.
셋째, 문제의 원천적 해결은 군에 의해 빚어진 것이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그 해결점이 모색돼야 한다.
넷째, 민화 위는 관련 피해당사자들이 제외된 구성체로서 진상의 철저한 규명을 통한 원천적 문제해결의 모색이 아니라 은폐와 항쟁정신의 희석화에 더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박찬봉 자칭 유족회장이 구성원으로 끼여 있다고 하나 이 사람은 80년 이후 지금껏 정권에 매수돼 오히려 학살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봤던 사람이다.
다섯 째, 문제발생 근원에 대한 객관적 검토과정이 너무 미흡할 뿐더러 고위층과 관계되는 배경의 진상은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섯 째, 미국의 개입에 대한 문제점은 아예 실정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학살만행에 대한 원천적이고 숨김없는 치유를 요구한다.
▲박찬봉 위원(5·18 유족회장)=우리 유족들 90%가 어려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법을 지키고 시책에 순응해왔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유관기관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 어용이냐. 전씨도 관계기관에 사정 안 했는가.
▲이충환 위원(구 신민당 최고위원)=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중국사람을 상당수 살해하는 등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일본패망 후 장개석은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며 일인들의 귀국 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취한 태도는 전세계가 칭송하고 있고 일본은 지금까지 감사해 한다. 광주사태는 본질이야 어떻든 동족간의 불행한 사태다. 하루속히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병학 위원(전 대한변협 회장)=미국이 광주사태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는 구체적 근거가 있는가.
▲전씨=직접 개입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지 모르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미국이 작전지휘권 안에 있는 부대의 이동을 묵인한 것은 개입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위원=정부 고위층이 광주사태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나.
▲전씨=12·12쿠데타이후 80년 「서울의 봄」을 불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실권자가 전두환 대통령이다. 노 당선자는 명령을 따랐건, 안 따랐건 뜻을 같이했다.
▲이 위원=두 사람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전씨=5·18사태가 서울·부산·대구가 아니고 광주에서 발생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사전에 군부집단에 의해 개입된 것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내란음모 도아니다. 군부세력이 사전개입에 의해 광주지역을 선택했다 .광주사태를 일으킬 수 있는 지역적 여건에다 김대중 씨를 매개체로 한 것이다.
▲이강훈 위원(독립운동가)=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광주사태에 대해 광주시민이 만족하지 못할지언정 실마리를 풀어보기 위해 모였다. 전씨의 말대로 하자면 혁명해야 한다. 뒤집어 엎어야 하는 것 아니냐. 좀 누그러뜨려 달라. 자중 자애 하면서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말도 염두에 두어달라.
▲구용상 씨(민정당 의원·당시 광주시장) 공개증언=80년 5월 17일 학생시위는 시민들이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악화되지 않고 일진일퇴하다 18일부터 사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입하면서 학생들의 시위도 시가지 중심에서 과열됐고 이에 맞서 계엄군의 진압도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과 여성들에 대해 격렬한 행동을 취해 이를 본 일부 시민들이 학생 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는 전화제보가 상당수 있었다. 19일 시내분위기는 더욱 살벌해 계엄군은 데모학생·시민을 붙잡아 마구 구타하고 연행했다.
이에 고등학생까지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많은 차가 불타고 일부 계엄군인도 시민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하는 등 충돌이 시작됐다. 이날 밤 경상도 번호 판을 붙인 트럭 2대가 불탔고 파출소 2개소가 방화됐다. 시중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려한다」「여자들의 옷을 벗기고 가혹행위를 했다」는 등의 상상할 수도 없는 유언비어 속에 사태가 급박하게 악화돼 갔다. 이날 상무대에서 있은 광주 기관장대책회의에서 본인은 시장으로서△연행 자 조기석방 또는 연행 자 명단공개와 석방일자 제시△민간 수습대책위구성 등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1일 사태는 더욱 악화돼 많은 인명피해를 내는 등 이 기간 중 최악의 층돌을 빚었다.
하오엔 헬기에 지사와 본인이 타고 3시간 여에 걸쳐 자제호소를 했다.
22일 박충훈 총리서리가 와 브리핑을 위해 계엄사로 갔다. 보고 후 지사와 경찰국장은 군의 진주문제에 대해 계속 협의키 위해 남았는데 이것이 도피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광주사태에 대해 당시 시장이었던 본인은 △초기의 진압과정에서 군이 해산·저지 등에 과잉진압행위로 일반시민까지 분개하고 학생들을 자극하는 소지가 다분했고△지역간 감정을 자극하는 많은 유언비어가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에스컬레이트 하게 했고△사태당시 광주시민들은 생필품이 부족하고 많은 무기를 소지했음에도 범죄발생이 1건도 없는 등 높은 시민의식을 보였고△무기 자진반납회수에 적극 협조했으며△21일 계엄군의 시내철수는 시민들의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기여했으며△사상자 숫자는 정부의 발표가 정확하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전옥주 씨 증언=광주사태 당시 나는 시민들과 계엄당국으로부터 간첩으로 오인 받았었다. 5월 20일 시내에서 수많은 학생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는 등 계엄군의 과잉진압 현장을 보고 난 후 시위대에 참여하게 됐다.
동사무소에 가서 앰프를 구하려 했으나 동 직원이 거절, 남자 1인과 같이 그 앰프를 강제로 가지고 나왔다. 이것 때문에 나중에 특수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받았다.
그날 밤 11시부터 버스를 타고 시 변두리지역을 돌면서 방송했다. 시민대표들과 함께 나는 도청으로 장형태 전남지사를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나는 연행된 사람들의 명단을 계엄군 측이 밝혀주도록 요구했다.
시민들은 교도소를 습격하려한 적이 없었다.
21일 하오 시민들의 손에도 총이 들려 있었다. 계엄군들이 총칼로 우리를 죽이는데 각목으로만 대응할 수는 없었다. 시민들의 무장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수단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기물파괴를 하지 말자』 『불순분자를 발견하면 신고해 달라』고 강조했다.
26일 상오 나는 일단의 시위대 앞에서 방송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 『저 여자는 간첩이다. 간첩이 아니면 저렇게 말을 잘 할 수 없다』며 나를 가리켰다. 그 남자의 말 한마디에 시민들은 나에게 달려들어 나를 체포했다.
▲이광노씨(당시 국보위 조사단장)=18일 상오 11시쯤 전남대생 2백여 명이 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충돌한 후 시내로 진출했으며 낮 12시쯤 금남로에 모인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력으로 진압이 어려워 계엄군 2개 대대가 최초로 시내에 투입 됐다.
이날하오 전주 주둔 7공수여단 33·35 대대가 투입됐는데 이들의 40%가 호남출신이었다.
21일 하오 3시 30분 광주세무서 직장 예비군중대의 무기고에서 17정의 소총이 탈취돼 무장시위가 시작됐다. 이어 방산 업체인 아세아자동차의 차량 2백여 대가 탈취 당했고 장성 등 22개 시·군에서 무기·탄약이 탈취 당했다. 장갑차를 앞세운 시민들이 광주교도소를 5차례습격을 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22일 시위가 목포·해남 등 전남일대로 확산됐고. 시민 수습대책위가 계엄 분소를 방문, 일부 총기를 반납했다.
23일 무장시민 33명이 투항하는 등 대화분위기가 있었으나 강경파들의 저항으로 성과가 없었다.
사태진압 후 현지에 내려간 조사단원들에게 광주시민들은 사태진행 과정 중 자신들의 △무기탈취 △교도소 습격 △과도한 지역감정 표출 △자체 수습실패 등에 유감을 표시했다.
조사단이 분석한 사태의 원인은 △뿌리깊은 지역감정 △특정 정치인의 사조직을 통한 영향력행사 △지역적으로 소외됐다는 인식에서 생긴 욕구불만 등이다.
근인으로는 △휴교조치에 대한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반발 △시위에 대한 계엄군의 대응조치 미흡 △악성 유언비어난무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광주사태 동안 시 전역에 배포되었던 「투사회보 7호」는 사망자 6백명·부상자 2천명이라고 주장하는 등 심각한 양상이었다.
계엄당국 측의 문제점으로 파악된 것은 비상계엄확대로 발생할 사태에 대해 사전대비가 충분치 못했던 점과 특히 학생시위 확산에 대한 대응조치가 적절치 못했던 것이다.
21일 하오 9시쯤 시위군중들이 목포 서를 습격, 서장을 위협하자 서장은 직원 60여명과 3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인근 섬으로 도피했다.
당시 피해집계상황은 사망 1백89명 (민 1백60명·군23명·경4명), 부상 1천13명, 무기 5천2백33정, 소총탄 29만발, 수류탄 5백52발, 재산피해 1백50억 원으로 집계됐다.
피해자보상 및 복구비로 총 2백12억 원을 정부에 건의했다.
▲장학로 위원(전 농수산부 장관)=몇몇 군 관계자의 진술을 보면 과잉진압이 시위확산의 직접 원인이 된 것 같다. 공산게릴라를 무찌르는 게 설치목적인 공수여단을 투입할 만큼 상황이 급박했나.
▲김재순 위원(샘터 사 사장)=정웅 씨는 당시 임무가 무엇인가.
▲이씨=군인은 책임을 완수한 다음에 이유가 있다. 당시 정 장군은 광주지역에 대한 전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었다.

<허남진·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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