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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잊지 못할 비오는 날 고목 아래 할머니 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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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30여 년의 선수생활을 끝내고 은퇴한 이승엽 선수의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두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꿈’과 ‘인내’. 열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처음으로 야구선수를 ‘꿈’꾼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는 비결을 묻는 후배들에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인내’라고 답했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인내하며 노력한 결과 꿈을 이루고, 많은 어린이가 꿈꾸는 롤모델이 되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원의 포토버킷(9) #'예술의 숲' 만드는 나무 사진작가 이흥렬씨 #어린 시절 서낭당 근처 지나다 본 할머니 사진 #그때의 느낌 살려 나무와 여자 이미지 작품 완성 #30년 동안 나무와 숲을 테마로 한 사진찍기 고수

나무를 찍는 사진작가 이흥렬. [사진 제자 신혜림]

나무를 찍는 사진작가 이흥렬. [사진 제자 신혜림]

필자는 최근 꿈과 인내를 떠 오르게 하는 또 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모로부터 선물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사진작가를 꿈꿔온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른 직업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이흥렬 작가(52).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뒤늦게나마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변신도 아름답지만, 일찌감치 꿈을 정하고 오랜 세월 한결같이 인내하며 단련하는 경우 또한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흥렬 작가에게 꿈을 안겨준, 이모가 선물해줬던 카메라. [사진 이상원]

이흥렬 작가에게 꿈을 안겨준, 이모가 선물해줬던 카메라. [사진 이상원]

먼저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천둥번개와 함께 억수로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소년 이흥렬은 고목 아래 서낭당 근처를 지나다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다. 천둥, 번개, 비, 고목을 배경으로 서낭당에 걸려 있던 할머니 사진이 그에게 아주 ‘그로테스크(grotesque)’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이후 이 고목을 보면 여자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어 떠오르곤 했다. 이때의 강렬한 기억은 이태리 유학시절 열었던 전시회 ‘누드가 있었다 그리고…’에 출품했던 ‘겨울’이라는 작품에 아주 잘 표현돼 있다. 유학하던 시절 집 근처 나무와 이태리 여학생을 찍어 암실에서 합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사진을 전공하고 그 이미지를 찍어보자고 결심한 이후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강렬한 기억을 테마로 찍은 작품 '겨울'. [사진 이흥렬]

어린 시절의 강렬한 기억을 테마로 찍은 작품 '겨울'. [사진 이흥렬]

다음은 이태리에서 귀국한 후의 기억이다. 서울 강남 양재천을 좋아해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작품활동을 하던 어느 날 뚝방길을 산책하다가 몇 백 그루의 나무에 꼬리표가 달려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근처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간선도로를 내기 위해 나무를 모두 자르고 이 아름다운 길을 없앨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워낙 좋아하던 길이라 아쉬웠지만 사람이 다닐 도로를 낸다는데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양재천 뚝방 길 나무 구명운동 

하지만 구의원들을 만나 실상을 알게 됐고, 교통운수과의 시뮬레이션 결과도 역시 주 도로인 강남대로의 상습적인 교통체증으로 인해 간선도로의 교통흐름이 전혀 빨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나무와 길을 지키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공청회에 나가 모두발언을 하는 등 열심히 뛴 결과 나무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간선도로 계획은 건너편 양재시민의 숲 밑으로 터널을 뚫는 것으로 변경돼 최근 공사를 개시했다고 한다)

'양재천 뚝방길 나무 지키기 운동'으로 이끈 꼬리표 달린 나무들. [사진 이흥렬]

'양재천 뚝방길 나무 지키기 운동'으로 이끈 꼬리표 달린 나무들. [사진 이흥렬]

전시회 '푸른나무'에 출품한 양재 플라타너스 숲. [사진 이흥렬]

전시회 '푸른나무'에 출품한 양재 플라타너스 숲. [사진 이흥렬]

나무와의 이러한 인연이 계기가 되어 이후 개최한 전시회의 제목을 ‘푸른 나무’로 붙이고 본격적인 예술사진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국의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푸른 조명을 주어 그 자태를 더욱 부각시켜 작품에 담아냈다. 이태리 유학시절 패션쇼 무대에서 조명을 받아 빛나던 모델들에서 영감을 받아 나무를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에는 시선을 나무에서 숲으로 옮겨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2013년 전시회 '푸른나무' 출품작(제주). [사진 이흥렬]

2013년 전시회 '푸른나무' 출품작(제주). [사진 이흥렬]

이전까지 조용히 개인적인 예술활동을 하던 이 작가는 ‘양재천 뚝방길 나무 지키기 운동’을 통해 여럿이 힘을 합치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그에게 선물해 줬다. 바로 ‘한국시각예술인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은 것이다.

이 작가와 조합원들은 ‘예술의 숲’이란 이름을 붙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00만 평 정도의 국유림을 장기 임대해 그 안에 작가들의 활동공간, 전시공간, 대안예술학교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2016년엔 경기도교육청과 함께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으로 사진, 그림, 디자인 등을 가르쳐 주는 ‘꿈의 학교’를 운영해 큰 호응을 얻었다. 또 강원도교육청과 손을 잡고 조합의 사진가, 디자이너 등 예술가들과 함께 조합 부설 출판사에서 초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에게 졸업앨범을 제작해 선물해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2016년 전시회 '숲' 출품작(담양 메타세콰이어). [사진 이흥렬]

2016년 전시회 '숲' 출품작(담양 메타세콰이어). [사진 이흥렬]

어린 시절 나무와 특별한 인연은 나무 지키기 운동, 나무와 숲을 테마로 한 전시회, 예술의 숲 조성 등으로 이어져 왔다. 그는 나무 덕분에 순수예술을 하는 사진작가로서는 작지 않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현재 ‘꿈꾸는 나무’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나무사진 전시회를 열고 있다(11월 29일~12월 9일, 아트스페이스 호서). 나무에서 숲으로 옮겨간 시선을 이제 다시 나무로 옮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무의 외양이 아닌 내면을 향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향 등을 표현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에 그림을 더하는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 이를 통해 자연 속에 서 있는 나무의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표현해 봤다고 한다. 30여 년간 정통 사진만을 고수해 온 그로서는 용기있는 변화가 될 것이다.
 그의 인생스토리를 들으며 가슴에 스며든 ‘나무와 꿈’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당연히 보여줄 수 있는 한 걸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7년 전시회 '꿈꾸는 나무' 출품작(가을밤 사과나무). [사진 이흥렬]

2017년 전시회 '꿈꾸는 나무' 출품작(가을밤 사과나무). [사진 이흥렬]

이승엽 선수는 야구선수라는 꿈을 정하고 수 많은 어려움을 인내하며 결국 최고의 선수로 은퇴했다. 야구선수라는 큰 틀은 일본프로야구 진출, 올림픽 금메달, 최다 홈런기록 경신 등 다양한 작은 꿈들이 완성해주었다. 야구선수로서 끝이 났으니 또 새로운 꿈을 꿀 것이다. 이흥렬 작가도 사진작가라는 꿈을 정하고 역시 수 많은 고비를 넘기며 지금까지 꿈을 이뤄 왔다.

사진작가라는 큰 꿈이 이태리 유학, 여러 작가활동, 나무 작가 등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꿈들로 채워지고 있다. 야구선수와는 달리 사진작가는 은퇴가 없다. 이작가는 ‘예술의 숲 조성’이라는 꿈이 이뤄져도 계속 사진작가로서, 예술가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갈 것이라고 한다. 우선 그가 만들 ‘예술의 숲’을 빨리 보고 싶다. 한 사람의 팬이자 서포터로서 응원하고 도울 것이다.

이상원 밤비노컴퍼니 대표·『몸이 전부다』저자 jycyse@gmail.com

우리 집 주변 요양병원, 어디가 더 좋은지 비교해보고 싶다면? (http:www.joongang.co.kr/Digitalspecial/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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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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