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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해결은 진상 규명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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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광주사태 진상파악을 위한 민주화합추진 위의 증언 청취가 3일부터 시작됐다.
첫날인 이날 하오에는 이광영씨(5·18 부상자 회부회장)와 정시채 의원(민정·당시 전남 부지사)의 증언이 있었다.
다음은 참고인들의 증언과 토론내용 요지.
▲이광영씨 증언= 5·l8 당시 정부는 온갖 수법으로 국민생존권을 억압했으며 그에 대한 민주세력의 활동이 격렬해지자 5월17일 자정을 기해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김대중씨를 비롯,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구속했다.
처음엔 학생들이 이에 항거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광주시민들은 처음 방관자 입장이었으나 경찰이나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 모습을 보고는 그 잔혹성 때문에 울분을 느껴 동참케 됐다. 18일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진압 당하고 희생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이 19일 자연발생적으로 모여 시위를 벌이게됐다.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가 철수한 후 치안부재 상태에 있을 때 한 건의 사건도, 한 건의 도적도 없었던 것은 지금도 광주시민이 긍지로 알고 있는 대목이다.
하루는 헬기에서 연발총소리가 나고 길을 가던 한 학생이 쓰러졌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적십자 병원에는 피 흘리는 사람들이 넘쳤으나 의약품과 피가 부족한 상태였다.
헌혈하겠다는 여중생을 전남대 병원까지 차에 태워 보내준 적이 있는데 그 여학생이 귀가 중 총에 맞아 숨진 사실도 있다.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는 구 시청 사거리 중간에 부상자 3∼4명이 쓰러져 있어 적십자 병원차로 이들을 후송하려는 순간 나는 척추에 총알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후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국이 의료보험카드를 주었으나 이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본인은 지금 다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마약 주사를 맞고 있다. 나보다 더 심한 사람이 많다.
현재 당국이 조사한 사망자 숫자는 적십자병원·기독법원·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있던 숫자에 불과하다.
청소차에 실려가 어딘가에 매장된 사체 및 공수부대 원이 어디론가 차에 태워 데려간 수많은 사람, 통합병원에서 죽은 사람들은 그후 어찌됐는지 알 길이 없다.
부상자 숫자만도 당국은 1천 여명이라 하지만 우리는 2천5백 여명으로 알고 있다.
당시 광주는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31 사단은 상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했고, 경찰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민 편에서는 등 민·관·군이 하나였다.
시민들의 손에 총이 들려 있었는데도 금융기관·금은보석상을 털려고도 안 했다.
저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구책으로 총을 취했을 뿐 시민들이 총을 가진 것은 정당 방위였다.
희생자 유가족 및 본인과 같은 부상자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어 개인적 입장으로는 민주화보다 보상이 더 시급한 실정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며 그에 따른 책임자 의법 처벌, 폭도로 몰린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이 있어야한다. 외부의 압력에 굴하거나 현실에 영합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광주는 민화 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6·29 및 대통령선거처럼 또다시 기만 술책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광주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
광주사태 진상조사는 국회에서 국정조사권이 발동되어 실시되어야 하며 피해자, 광주의 인권단체, 5·18 관련단체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진상조사단이 구성돼 실시돼야 한다.
▲이강훈 위원(독립운동가)=이씨의 진술 중 마지막에 민화 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우리의 인격을 모독한 것이다.
▲김재순 위원(『샘터』 발행인)=참고인 진술내용 중 특정인의 인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일단 신문에 나면 그들의 명예가 손상되고 회복하기가 힘들다. 이런 관점에서 참고인들의 의사에 따라 회의의 공개·비공개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방침을 재고해야 한다.
▲서영훈 위원(전 흥사단 이사장)=그 동안 광주사태에 관한 책을 다 읽었지만 오늘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도 있다. 이씨의 진술대로·적십자 완장을 차고 부상자를 구조하는 사람에게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면 이는 국제법위반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도 당시 적십자 사무총장으로 광주에 내려가 구호 활동을 할 때 부상한 경찰을 적십자대원들이 구조하려다 시민군의 제지로 그 경찰이 끝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이씨가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들 앞에서 견해가 다르다고 해 그렇게 모독발언을 한 것은 매우 기분이 상한다.
▲박찬봉 위원(5. 18 유족회장)=위원 여러분께서는 피해자의 심정과 입장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이강훈 위원= 나는 광주 피해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번 잘해 보자는 뜻에서 민화 위가 출범했는데 저런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몹시 불쾌하다.
▲이병용 위원(전 대한변협 회장)=누구누구 등을 거론하면서 광주사태에 책임 있는 사람으로 규탄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는 민정 당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들러리라고 하는 것은 민화 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이런 진술은 의장이 마땅히 제지했어야 옳았다 .김재정 위원이 제의한 비공개 검토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고정훈 위원(천도교 교령)=우리는 용서하고 화해한다는 차원에서 민화 위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각본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는 발상은 용납하기 힘들다.
▲김문희 위원(한국 걸스카우트연맹 총재)=이씨의 증언 마지막 부분에 분개하는 것은 동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 진술 받아야하며 그런 면에서 참고인 증언 청취의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공개회의가 민주화합을 위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박옥재 위원(5·18 부상자회 회장)=광주 피해자들이 당한 박해와 핍박은 필설로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꺼리는 가운데서도 이씨는 용감히 나섰고, 또 그가 여기 올라오는 일 자체도 박해를 받았다. 이씨가 원로들 앞에서 무례했던 점은 대신 사과를 드린다.
우리가 오늘을 기점으로 비공개회의를 한다면 광주출신 증인들이 출석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최종현 위원(선경그룹 회장)=우리는 지금까지 광주사태가 너무 일방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방향에서도 들여다보고, 또 그 치유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 광주치유를 논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는 그 취지에 어긋난다.
▲이충환 위원(구 신민당 최고위원)=이씨의 발언은 청천벽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하는 것은 더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사실에 관한 진술 이외의 발언을
의장이 제지하는 식으로 운영하면 된다.
▲정시채 의원(당시 전남부지사) 비공개증언=80년 5월 19일 진도의 고향집에 일이 있어 내려가 있던 중 뉴스를 통해 광주 시위사태를 듣고 급히 광주로 올라왔다. 당시 시내에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어 최루가스가 도심을 덮고 있었다. 곧바로 도청으로 들어갔고 당시 모친상을 당해 광주시 변두리지역에 체류 중이던 장형태 지사를 대신해 도 행정을 맡았다.
20일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수습 노력의 일환으로 시민들을 직접 달래보기도 했고,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21일 시위군중들이 장 지사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상중임에도 불구, 장 지사는 면담에 응하려했고 나는 사전에 시민들의 분위기를 알아보려고 시위 현장에 가보았다. 시민들이 흥분해 면담이 위험하다고 판단, 장 지사와 나는 헬기를 타고 마이크로 "해산을 설득했고 유인물도 뿌렸다.
22 일 시위는 더 한층 격렬해졌고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시민 군이 도청을 점 거한 후 나는3 0분간의 설득 끝에 도청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도청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시민 군에 가지고 있던 무기를 반납하도록 설득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사태수습을 위해 최한영 씨(당시 78세·독립운동가·작고)를 위원장으로 해서 위원 14명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수습위원들은 시민·학생들에게 귀가할 것을 설득했고 무기회수작업을 벌여 3천 정을 회수했다. 이러한 수습노력에도 불구,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27 일 새벽 4시 계엄군의 진압작전으로 사태는 끝났다.
(증언이 끝난 후 정 의원은 위원들의 질문에 답했다)
- 당국이 발표한 사망자 수는 틀림이 없는가.
『사태가 평정된 후 사망·실종자 신고기간을 설정, 신고를 받았으나 접수된 것이 없었다. 또 신고기관을·정당·교회·언론기관 등으로 해도 별로 접수된 것이 없었다. 2건이 신고됐으나 사태 전에 행방불명된 사람들로 밝혀졌다.
-시민군들이 수습위원들의 노력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당시 방송국이 불탔는데 뉴스방송은 가능했나. 또 취재는 허용됐는가.
『방송은 가능했다. 내·외신기자의 취재가 자유로이 허용되었다. <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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